게임기 사업의 딜레마에서 탈출하라.

삼성 LG 현대등 대형 전자업체가 공통된 고민에 빠졌다.

차세대 주력 상품으로 선정하고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게임기 사업이
바닥을 해메고 있는 것.

그렇다고 "과감"하게 사업을 거둬들일 수도 없다는 게 이들의 고충이다.

게임기 제작기술은 바로 동화상 재생기술을 말한다.

이는 멀티미디어의 핵심기술이다.

멀티미디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선 게임기 기술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사업을 지속하자는 적자가 늘고 그렇다고 사업을 포기하자니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는 "진퇴양난"에 처한것.

한마디로 전자업체들에게 게임기 사업은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되버렸다.

국내업체들의 사업부진은 올해 실적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삼성전자는 16비트 게임기를 지난 10월말까지 약 4만5천대 팔았다.

올해말에는 잘해야 5만2천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16비트 게임기의 "브레이크 이븐"은 월 1만대.

그러니까 올해 판 것보다 2배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간신히 적자를
모면하는 것이 된다.

현대전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대는 10월말까지 3만2천대를 팔았다.

연말에 가도 4만대를 넘어서기 힘들 전망이다.

LG전자의 32비트 게임기 연말 판매예상은 6만대.

그러나 10월말까지 4만5천대가 팔린 것을 보면 목표달성이 불투명하다.

게임기 사업이 이처럼 바닥권을 해메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소프트웨어의 공급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는 자료정리 등에 사용되는 일반 컴퓨터용
소프트웨어와는 달리 수명이 길어야 한 두달이다.

오락용이기 때문에 싫증이 나면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한달에 최소 5개 이상의 게임 소프트웨어가 나와야
한다"(삼성전자 멀티미디어추진실 김건중전무).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국내업체의 실력으로서는 32비트 게임용 소프트웨어를 한달에 한 개이상
만들어내기도 벅차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니 시장 수요를 못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업부진을 부추기는 또다른 요인은 게임기의 사용자와 구매자가
다르다는 것.

게임기는 주로 국민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이용한다.

하지만 대당 20-30만원씩 하는 이 기기를 돈 내고 사는 것은
학부모들이다.

"학부모들에겐 게임기가 공부에 방해되는 오락기라는 인식이 강하다"
(현대전자 윤장진부사장).

"게임기를 사주면 공부는 안하고 전자오락만 할 것"이란 선입견을 가진
부모들이 적극적인 구매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LG나 현대가 전국 곳곳에 전자게임장을 세우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인식을 없애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문제는 사업환경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고 기술도 없지만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실제로 LG전자는 최근 3DO 게임기 사업 포기를 내부 검토하다가 일단
지속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부서에선 "사업 포기"쪽으로 기울었지만 이헌조회장이 "계속하라"는
엄명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회장의 논리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느냐"는 것.

게임기 사업을 포기해서는 멀티미디어용 기술을 신속히 개발할 수 없다는
게 이회장의 판단이다.

그만큼 게임기 사업은 기술적 파급효과가 크다는 얘기다.

게임기는 움직이는 화면을 기초로 한다.

디지털 방식의 동화상 처리기술이 핵심이다.

"게임기에선 VOD(정보주문형 비디오)등 멀티미디어 서비스에서 활용되는
기술은 모두 사용된다"(삼성전자 김전무).게임기는 멀티미디어기기의
종합판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게임기 산업 종합 발전방안방안(통산부)"이나
"게임기 산업 협의회 설립(정통부)"등 각종 육성방안을 내놓고 있다.

"게임기 기술을 가졌다는 것은 멀티미디어 기술을 리드한다는 말과
같다"(전자공업진흥회 이상원부회장)는 인식때문이다.

국내업체들은 진퇴양난의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순 없을 것같다.

삼성전자가 이달들어 일본 세가사와 손잡고 32비트 게임기를 내놨듯이
해외 협력을 강화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매출증대로 이어질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렇다고 기술이 세계 수준에 급속히 다가설만큼 개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게임기 업체들은 사업 방향을 명확히 잡아야 한다.

열매를 딸 것인지 아니면 나무를 키워 목재로 쓸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전자공업진흥회 이부회장)의 말은 딜레마에 빠진
국내업체들이 한번쯤 새겨봐야 할 말인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