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현대그룹 회장이 모처럼 여유있게 해외출장을 보내고 있다.

자동차사업을 챙기랴 그룹업무를 총괄하랴 바쁜 와중에도 그는 부인
박영자여사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터키 자동차합작 공장 기공식에 참석키위해
이스탐불을 방문중이다.

정회장은 터키로 오는 도중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잠시 들러 모터쇼를
참관하면서 자동차분야 신규 사업구상을 가다듬기도 했다.

정회장을 이스탐불의 보스포러스 호텔에서 만나 궁금한 점들을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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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이스탄불 이성구 특파원 ]]]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둘러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정세영회장=유럽업체들이 중소형차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르노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국영기업체로서 지난 4~년간 겪은 어려움을 소형차 특화전략으로 잘
극복해나가고 있는 것 같더군요.

한국 업체들도 자동차를 특성화해 제기능을 다 갖추고서도 싸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벤츠 BMW같은 초우량업체들을 벤치마킹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차의 이미지를 바꾸기위해 앞으로 4~5년정도는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디다.

-요즘도 자동차사업을 직접 챙기십니까.

<>정회장=어디 시시콜콜 일을 볼 수야 있겠습니까. 생산계획과 내수.수출
계획 수립 등은 임원들에게 맡겨놓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 89년처럼 대미자동차수출이 급락했던 사태가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본 방향만은 제가 직접 관여하고 있지요.

-현대그룹의 세계화전략을 어떻게 구상하고 계신지 말씀 좀...

<>정세영회장=외국에 투자를 많이 하고 되도록 사람들도 많이 내보내는
방향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대그룹은 그동안 다른 그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등 경영활동이
움츠러들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그룹의 주력사업이 중공업부문에 집중돼 있어 한번 투자를 하면
그룹 전체에 미치는 여파가 커서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룹경영에 대한 외부 변수가 정리된 만큼 미뤄왔던
해외사업을 활발하게 벌여나갈 참입니다.

특히 전자와 자동차분야에 신경을 많이 쓰려고 합니다.

박세용사장을 그룹 종합기획실장에 기용한 것도 그의 국제적 안목과
감각을 활용하려는 복안에서였습니다.

-최근 현대전자가 중국 대련에 대규모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공장을
짓기로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겠군요. 자동차는 어떻습니까.

<>정회장=해외 생산기지 건설을 서둘러야 합니다. 특히 유럽 진출이
시급합니다.

2000년까지는 공장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지요. 영국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과감한 개방정책을 펴고 있어 경제분야에 관한 한 국경이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거든요.

영국의 경우 자동차회사라곤 롤스로이스사 한군데 밖에 안남았는데
그나마도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정도로 빈사상태기 때문에 영국정부는 특히
외국 자동차공장 유치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지요.

체면도 따지지 않을 정도거든요.

동남아지역으론 인도네시아를 투자 적격지로 보고 있습니다.

태국은 일본업체들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라 신규 진출이 어렵습니다.

인도도 진출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인구가 9억이나 되는 큰 시장이기 때문이지요.

일본 스즈키사가 연간 17만대를 생산해 아주 재미를 보고 있기도 합니다.

곧 1억이상의 인구가 승용차를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터키 자동차공장은 생산 계획을 어떻게 잡고 계십니까.

<>정회장=초기 생산규모는 일단 5만대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2000년까지는
12만대로 늘릴 생각이지요.

터키는 부품산업이 잘 발달돼 있어 질좋은 차가 나올 것으로 낙관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대규모 해외투자에 대해 정부가 소요금액의 20%정도는
자기자본으로 들고나가도록 하는 규제조치를 부활하기로 했는데...

<>정회장=원론적으로 따지면 정부 조치에 이의를 제기할 건 없습니다.
그러나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얼마든지 값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도 굳이 투자금액의 20%나 되는 돈을 값비싼 국내자금으로 들고
나가라는 건 재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투자는 기업들이 자기 책임아래 단행하는 것인 만큼 자금조달 문제도
기업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정부에서는 기업들의 대규모 해외투자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있는
또다른 이유로 국내산업 공동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기우에 불과합니다.

요즘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발행한 "2020년"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만
그 책을 봐도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두뇌산업만 국내에 남고 그밖의 산업은
생산비용이 낮은 곳을 찾아서 해외로 나가는 것은 역사적 흐름이라고
썼습디다.

기업들이 해외에 투자해서 번 돈이 어디로 갑니까.

결국은 국내로 다시 들어옵니다.

또 제조업 제조업만 외치는데 국내에서의 서비스산업 육성도 시급합니다.

과거엔 나도 제조업만이 나라를 살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현대그룹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라고 보고 있습니까.

<>정회장=글쎄요.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인데...87년이후
인건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데 비해 생산성은 크게 오르지 않아 걱정이
됩니다.

웬만한 제조계열사들의 경우 1인당 연간 인건비 부담이 3만8천~
4만2천달러나되고 있는데 이건 미국같은 데 비해서도 꽤 높은 수준입니다.

예컨대 미국에서 인건비가 제일 비싼 뉴잉글랜드 지역 근로자들의 연봉이
평균 2만4천달러밖에 안됩니다.

시간당 임금은 12달러에 불과하고요.

삼성이 투자한 앨라배마공장의 경우 고급인력을 확보하고 있는데도 1인당
인건비는 시간당 5달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의 임금수준이 더이상 올라가서는 곤란합니다.

현대그룹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이 안고 있는 또한가지 문제점은
관리분야 인력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관리직 인력들이 두배이상 효율을 높이지 않으면 경쟁력 약화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현대자동차를 예로 들면 앞으로 생산능력을 두배로 확장하면서 인력은
가급적 현재 수준을 유지한다는 계획입니다.

대신 사무실에 연필과 책상을 없애고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요컨대 문제는 사람을 줄이는 건데, 누가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겠느냐는
것이지요.

-대기업그룹들의 신규 사업이 정보통신 자동차등 특정 업종에 너무
치우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데...

<>정회장=전경련회장단 회의에서도 거론된 적이 있지만 중소기업이 할 수
있는 분야에는 대기업들이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마인드는 절대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전자업종의 경우 분야도 넓고 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있기
때문에 국내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확대해나갈 생각입니다.

-정주영명예회장이 얼마전 복권된 이후 그룹에 활기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정회장=명예회장께서 복권이후 기분이 좋아 여러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론과 외부에서 일부 오해를 하기도 했지요.

복권 전이나 이후에나 회사에 나와 한 10~20분 일을 보다가 골프를 치는등
건강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그분은 뭐든 지는 걸 싫어하는 분입니다.

연세가 들면서 외로움을 타시기 때문인지 문인과 체육인등 많은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교제의 폭도 넓히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