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말 편의점 로손의 운영업체인 태인유통이 코오롱그룹에 인수되기 직전
이 회사의 신기윤기획이사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받은 특명은 당시 한국진출을 원하던 미국의 도매업체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내는 것.

회사의 존폐기로에서 마지막 구명선을 찾아 떠난 그는 편의점이 미래형
유망산업이라는 장미빛 전망만 믿고 무리한 투자를 감행했던 지난날을
한없이 후회했다.

제빵업체인 샤니를 모기업으로 한 로손의 초창기는 화려했다.

태인유통이 94년 한햇동안 개점한 점포는 무려 1백48개.

이틀에 하나꼴로 문을 연 셈이다.

이러한 기세로 태인유통은 삼성(훼미리마트) LG(LG25) 빙그레(써클K)
동양(바이더웨이) 미원(미니스톱)등 대기업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업계
3위를 차지했다.

"초창기에 문을 연 60-70개의 점포는 모두 하루매출이 1백50만원을 넘는
우량점포였다. 사업이 연일 상승세를 타자 욕심이 생겼다. 이정도의 기세
라면 빚을 얻어써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이 함정이었다.
갑작스런 사업확장으로 부실점포가 쏟아지며 자금이 달리게 됐다"

신이사의 회고다.

신이사의 미국자본 유치교섭은 양측의 조건이 달라 실패로 끝났다.

이후 태인유통은 제일제당 효성물산등과의 접촉이 있은후 금년초 끝내
코오롱그룹에 넘어가고 말았다.

태인유통의 침몰은 유통업계의 무한경쟁속에서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업체
가 살아 남는다는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이 회사의 항복선언은 70년대의 건설업계에 이어 80년대에
불어닥친 제조업체의 유통업 진출바람 역시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90년대 들어 유통업계는 대기업위주로 시장질서가 재편되는 혁명기를 겪고
있다.

할인점 편의점등 대기업이 주도하는 신업태와 중소업체가 지탱해온
슈퍼마켓 재래상가등 구업태간의 세대교체바람속에 수많은 중견기업들이
도산 또는 인수합병(M&A)을 당하며 잊혀져갔다.

최근에만도 라이프유통 영동백화점 센토백화점 세븐일레븐 비바백화점
맘모스백화점 스파쇼핑(부산) LA마트 리치마트 등이 도산하거나 주인이 바뀌
었으며 올해엔 중소 연쇄점본부 3-4개와 벤더업체인 수화유통이 부도를 냈다.

한국은행이 최근 집계한 금년 1-4월의 도소매업체 부도건수도 모두
1천39건으로 전년동기의 9백91건보다 48건이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업의 주도권이 디스카운트스토어 회원제창고형클럽 등 가격할인점으로
넘어가며 식품 잡화등 주력상품이 겹치는 중소상인들의 고민은 더욱 커지고
있다.

중소상인들은 공동물류센터의 건립과 함께 공동구매 공동판매 등 협동화
사업으로 활로를 찾으려 하지만 "역부족"이라는 패배감에 젖어있다.

중소도매업체들 역시 가맹점에 대한 자본투자, PB상품의 개발등에 눈을
돌리고 있지만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비교적 여유가 있다는 한양 LG 해태 농심가등 대형수퍼체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들은 당장 맞세일작전으로 할인점에 맞서고 있지만 장기적으론 할인점
사업에 동참, 정면승부를 벌여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나로컨설팅의 김용호부장은 "대기업을 위주로한 유통업계의 재편은
거스를수 없는 대세"라고 전제한 뒤 "대기업이 갖추기 힘든 상품을 특화하고
서비스를 개발하는등 변신하는 업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퍼체인협회의 반지명연구위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존할 수 있는
유통정책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시장개방후 외국유통업체의 공세를 누가 막아내겠습니까. 동네 구석구석
에서 생필품유통을 담당해온 중소상인이 살아야 국내 제조업체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유통혁명의 한가운데서 당면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뜻있는
유통관계자들의 한목소리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