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휴렛팩커드 본사 현관에 들어서면 정면벽의
한 도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로 세로 1m크기의 이 도표는 모든 사원의 근무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각 층마다 가로 세로 일렬로 서있는 기둥에 일련번호가 매겨져있고 이
기둥번호를 기준으로 각 사원의 책상위치가 표시돼 있다.

방문객이나 직원은 이 도표를 보고 원하는 사람을 손쉽게 찾아간다.

사람찾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스스로 정확히 찾아가 다른 사람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 이 도표가 걸려있는 이유다.

2층에 올라가면 전체사무실중 3분의 1가량이 비어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엔 책걸상이 쌓여있다.

얼마전까지 이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중 상당수가 다른 부서로 이동
하거나 태스크포스팀으로 옮겨가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탓이다.

업무공정을 합리화하고 혁신해나가는 과정에서 조직개편이 쉼없이
일어나고 있는 휴렛팩커드의 살아있는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비즈니스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BPR)의 현장입니다"

한국인으로서 휴렛팩커드본사에서 일하고 있는 박동욱차장은 "BPR가
휴렛팩커드의 전부"라고 말한다.

컴퓨터및 컴퓨터주변기기 생산업체인 휴렛팩커드는 BPR의 선두기업이다.

일찍이 통신네트워크를 이용,본사와 현장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효율적으로 부품과 자재를 조달하고 있는 것은 BPR의 모범사례로 널리 회자
되고 있다.

휴렛팩커드가 추구해온 이같은 혁신이 처음부터 BPR로 불려지진 않았다.

많은 경영학자들이 휴렛팩커드의 경영혁신사례를 들어 BPR를 설명하면서
부터 BPR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휴렛팩커드의 BPR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중 하나는 인력관리. 교육
훈련을 중시하고 절대 직원을 해고하는 일이 없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회사는 우선 2년간 직무훈련과 적성파악에 주력한다.

주어진 업무수행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적절한 자리로 재배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다.

부하직원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육성개발했느냐는 부서장이나 팀장에
대한 업무능력평가시 중요한 척도라고 월터 라이허트국제부장은 말한다.

인력확충은 점진적으로 철저한 계획아래 이루어진다.

호황때 많은 인력을 뽑았다가 불황이 닥쳐오면 마구 잘라내는 다른 많은
기업들과는 전혀 다르다.

휴렛팩커드의 인력증가율은 10년에 10%정도.

어떤 부서가 10년전에 10명이었으면 지금은 겨우 11명으로 늘어나있다.

연평균 18%의 성장을 지속,지난 10년간 매출이 5배로 늘어난 기업의 인력
증가추이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같은 인력확충전략이 라이허트국제부장의 말처럼 휴렛팩커드를
"감원없는 기업, 종업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기업"으로 키워왔다.

휴렛팩커드의 BPR는 조직의 완전 분권화로 그 깊이를 더해 간다.

조직은 크게 컴퓨터, 컴퓨터시스템, 계측기기등 4개사업본부로 나뉘어져
있다.

각 사업본부는 다시 4~7개의 부서로 갈라진다.

이 사업본부와 부서는 모두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고 있다.

인사와 예산에 관한 분권화는 특히 두드러진다.

본부장은 회장의 허가없이도 다른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는등의 사업
투자에 최고 50억달러까지 마음대로 쓸수 있다.

시설투자에는 비용의 제한이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분권화가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부서간 긴밀한 협력도 요구되고 있다.

라이허트부장은 사업단위간 경쟁과 협력이 휴렛팩커드를 글로벌시장에서
성공할수 있도록 하는 요체가 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휴렛팩커드의 BPR는 과감한혁신을 요구한다.

"가장 잘하고 있을때 그 분야를 포기하라"는 루이스 플래트회장의 말처럼
휴렛팩커드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전체매출에서 최근 2년간 개발된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었다.

제품혁신에 대한 열의가 어느정도인지를 단번에 알수 있게 해주는 수치
이다.

휴렛팩커드의 제품및 기술혁신은 56년전 회사설립후 지금까지의 장기적인
매출구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설립당시는 계측기가 주력품목으로 지난 70년대중반까지 매출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해 매출구성에서 계측기의 매출비중은 약 30억달러로 전체의
10%를 갓넘었다.

반면에 컴퓨터의 비중은 80%에 육박한다.

계측기에서 프린터로, 다시 워크스테이션으로 매출의 무게중심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모두가 가장 잘하고 있을때 자만하지 않고 다른 신제품으로 신속하게
사업영역을 넓혀가는 혁신의 덕택이다.

혁신을 가능하게 했던것은 조직적인 연구개발(R&D)체계와 과감한 투자였다.

휴렛팩커드의 R&D는 2단계로 돼있다.

기초연구는 중앙연구소, 제품개발은 각 부서의 R&D센터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라이허트부장은 휴렛팩커드가 IBM AT&T와 더불어 미컴퓨터. 통신업계의
3대 R&D투자업체라고 말한다.

지난해 총매출대비 R&D비용은 8.1%로 20억달러에 달했다.

휴렛팩커드는 매출액의 8~10%를 R&D에 투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매출액증가율과 R&D증가율은 거의 일치하고있다.

휴렛팩커드의 R&D에서 특징적인 것은 산학협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휴렛팩커드는 대학연구소에 기초개념에 대한 연구만을 위탁한다.

신제품을 개발하라는 요청은 하지 않는다.

기초개념에 대한 연구만 하니 실제로 제품개발에 응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떻게 보면 산학협동연구성과가 "별로"라고도 볼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휴렛팩커드의 강점이 엿보인다.

BPR의 선두주자로서 업무의 효율성을 중시하지만 R&D에서는 단기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꾸준히 투자하면서 당장 효과가 나오지 않는 산학합동연구
에도 정열을 쏟고 있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