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려야만 살아남는다"

전자업계에 때 아닌 사업다각화 경쟁이 치열하다.

내로라하는 대형 전자업체들이 게임기 스피커등 "중소형 사업"에 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것.

지난 연말 LG전자(금성사)가 "3DO"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전자오락
소프트웨어 시장에 뛰어든데 이어 삼성전자는 최근 "종합 오디오업체"를
선언, 미국업체와 손잡고 1천만원대 스피커를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현대전자는 비디오CD시장에 진출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고전적인 대기업들의 "문어발"이 첨단 전자업계로 까지
뻗쳐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올 법 하다.

그러나 해당 기업들의 얘기는 전혀 다르다.

"복합화 융합화"를 특징으로 하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고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기술경쟁 파고를 헤쳐가기 위해선 "업종내
사업다각화"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대우전자가 최근 영상사업을 본격화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케이블TV의 영화프로그램 공급권을 따내고 방송국을 개설한데 이어 올해안
에 전국 10개소에 극장을 설립, 직접 운영하겠다는 얘기다.

전자업체가 영화사업을 한다는 것이 언뜻 보아서는 이해가 안되지만 바닥
에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멀티미디어는 결국 눈으로 보는 것이 기본이라는데 착안, 영상기술을 확보
하고 "보는 제품"을 파는 노하우를 쌓겠다는 뜻이다.

현대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 회사의 주력사업은 전장이나 통신시스템등 산업전자분야였다.

전자업체로서는 중후장대형 사업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 회사가지난해부터 비디오CD분야에 진출,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유명 가수를 등장시킨 광고가 연일 방송과 신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는 멀티미디어시대에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 이회사의 판단이다.

전자업체의 업종내 사업다각화는 멀티미디어시대를 대비한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안정된 사업구조를 갖자는 것이다.

반도체업계가 메모리반도체중심의 사업구조를 탈피, 비메모리반도체사업
강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 좋은예다.

삼성전자는 앞으로 5년간 1조3천억원을 투자, 8억달러에 불과한 비메모리
반도체 매출액을 2000년까지 50억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사업계획을
최근 확정했다.

이를 통해 현재 9대1정도의 메모리대 비메모리 사업비율을 6대4로 전환
하겠다는 계획이다.

현대전자는 아예 미국의 비메모리전문업체를 인수해 버렸다.

덕분에 전무하다시피 했던 이 분야사업을 올해부터 본격화해 사업구조를
메모리 75%, 비메모리 25%로 가져갈 수 있게 됐다.

LG반도체 역시 올해 ASIC(주문형반도체)등 비메모리분야에 집중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메모리반도체와 비메모리반도체는 설계와 제조공정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생산장비도 쓸 수 없다.

메모리반도체 생산업체가 비메모리분야에 진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업계가 금맥으로 꼽히는 메모리분야보다 비메모리분야 사업확대에
나서는 것은 투자위험 분산차원의 전략이다.

메모리반도체는 투자위험도가 극히 높다.

공장하나 건설하는데 1조원이상이 들지만 순식간에 공장가동이 중단될
수있다.

세계시장부침이 심한 탓이다.

이때문에 비메모리부분을 강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현대전자 박찬종이사는 "지난해 회사매출액 2조1천억원중 65%를 메모리
분야에서 달성했다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 된다"며 "전체 매출에서 이 분야의
비중을 끌어내리는 것이 당면한 숙제"라고 말했다.

업종내 사업다각화는 국내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선진국 기업들 사이에서 활발히 진행되는 전략적 제휴도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오디오전문업체로 출발한 일본의 소니사가 미컴퓨터회사인 애플사와 제휴,
종합전자업체로의 변신에 나선 것이 좋은 예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업체끼리 기술을 주고 받으면서 업종내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업종내 사업다각화는 피할 수 없는 물결인 것으로 보인다.

"기술개발경쟁시대"의 폭풍우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더많은 뿌리를 내려야
하고 멀티미디어라는 과실을 따내려면 새 가지를 계속 뻗어야 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이런 추세에 대한 경계론도 없지 않다.

가뜩이나 양적 팽창을 거듭하고 있는 전자업체들이 사업을 서둘러 확장
하다 보면 스스로의 "몸"을 주체하기 힘들게 되고, 이것이 빠른 기술변화에
대한 업계의 대응을 도리어 무디게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백만기통상산업부 전자기기과장은 "전자업계에제기되고 있는 과제는
"강하고 효율적인 기업"만이 아니라 상황변화에 신속대응할 수 있는 스피드
를 갖는 것"이라며 "지나친 사업다각화로 조직의 관료화등 몸살을 앓고 있는
NEC사 히타치사등 일본기업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조주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