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물 배출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사전에 배출시설 설치에
관한 규제를 철저하게 시행하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염배출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게 우리 목표입니다. 때문에
그 방법을 사전규제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환경설비는
기술적으로도 복잡합니다. 정부가 일일이 사전에 검사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러다간 욕만 먹어요. 자의적이고 불투명한 규제라고 말입니다"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민자당 정책조정실에선 이런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상정이 추진되고 있는 기업활동규제완화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심의하는 자리였다.

"사전규제 고수"를 강조한 쪽은 환경처 관료들.

"사전허가제도는 폐지한다. 배출시설의 설치.변경은 기업의 자율에 맡긴다.
대신 최종배출구로부터의 배출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사후규제만 존치
시킨다"는 민자당측 개선안은 영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기업들이 철저한 장비를 갖추고도 오염물을 쏟아붓기 일쑤인데 그나마
남아있는 사전검사 규정마저 폐지하자는 건 행정의 포기나 다름없다"는
환경처쪽의 철벽방어에 당쪽이 오히려 설득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기술적인 문제까지 행정력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건 구태의연한 행정
만능주의적 발상일 뿐"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메아리없는 외침이 돼버릴
판이다.

사실 민자당의 개정안은 이런 전문가들의 자문과 업계의 호소를 수렴해
만들어진 것이다.

개정작업에 참여한 곽일천환경기술개발원 책임연구원의 얘기를 들어보자.

"선진국정부는 한결같이 사전규제보다는 결과규제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프랑스같은 경우는 공장주변 주민들에게 환경오염도를 측정토록 하는
모니터링제도를 도입하고 있어요.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시민소송제로
기업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후규제로 일을 풀어 나가고 있지요. 우리나라
처럼 까다로운 사전규제가 없이도 환경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습니다"

보다 직설적인 얘기들도 많다.

"사전규제요? 말이야 좋지요. 제대로 챙길 능력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전담인력도 없고 전문성도 없으니까 형식적인 설비검토에만
그칩니다. 괜시리 기업에 불필요한 일거리만 줄 뿐 실질적인 효과도 없는
전시행정일 뿐입니다"(A석유화학 B공장장)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정부가 왜 수이 하지도 못할 불투명하고 까다로운
사전규제를 고집하겠습니까. 그래야 끗발과 먹을 떡을 지킬 수 있어서가
아닙니까"(C대학 D교수.기업활동규제완화 심의위원)

투명한 행정-.

해방이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도 없이 내건 모토다.

그러나 정부가 추구하고 주창하는 "투명"은 아무리 벗겨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양파와도 같은 것일까.

숱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그 "투명"은 다다를 수 없는 "이어도"와도 같은
추상적 상징어가 돼 버렸다.

신정부들어 이 말이 유난히 강조되기 시작했는데도 상황은 도통 달라진게
없다.

한가지만 예를 더 들어보자.

정책집행의 경우로.

대표적인게 국세청이 얼마전 "국세 징수행정은 투명하다"고 선언했다가
며칠도 못가 망신만 당하고 만 케이스다.

지난 10월초 인천 북구청 세무직원들의 도세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지자
국세청은 난데 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지방세를 걷는 일선 지자체와 달리 국세를 걷는 세무서는 징수과정에서
어떤 비리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세무비리가 징수과정이 아닌 세금부과과정에서 대부분 저질러지고 있는데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아니나 다를까.

국세청장의 친절한 해명이 발표된 며칠 뒤 "일"이 저질러지고 말았다.

인천 세무서직원들이 호텔 슬롯머신업자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아
온 사실이 그만 들통나 버린 것.

그 뿐인가.

포항에서도 광주에서도 세무서직원들의 비위사실이 꼬리를 물었다.

이들 비리는 모조리 불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세금부과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세무관료들이 자의적으로 집행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현재의
세무행정을 근본적으로 혁파하지 않는 한 국세청의 "투명선언"은 한낱 블랙
코미디가 돼버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왜 이런 근본적 문제가 바로잡히지 않을까.

까닭은 간단하다.

"투명"이 추구되면 될수록 관료집단의 입지는 좁아져 버리는, 이를테면
상충(trade-off)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행정이 불투명하면 할수록 관료들이 챙길 업무가 많아진다.

그래야 지금과 같은 "비대한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도
갖춰진다.

어디 그 뿐인가.

D교수 말마따나 "먹을 떡"도 지킬 수 있다.

병인이 분명하면 요법도 명료해진다.

행정개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그렇지만 아주 간단하게 바꾸기만 하면
된다.

관료조직을 지금보다 대폭 줄여 버리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행정제도가 투명하지 않고서는 많은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가 없게 된다.

관료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라도 행정은 저절로 투명해진다는 얘기다.

그래야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경제관료들은 정말 사심없이 일만 열심히
한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매도당하는 현실이 싫다. 징글징글하게 관을
비난하는 신문기사를 읽으면 하루에도 몇번씩 ''까짓 것 때려치워야지''라는
생각이 안들수 없게 된다"(상공자원부 C과장)는 관료들의 억울함도 근원적
으로 풀어줄 수 있을 게다.

그런데 신정권이 추진하는 행정개혁은 그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고
말았다.

출범초기 시늉만 내는 몇건의 부처통폐합을 해버리고는 모든 행정개혁의
과제를 관료집단 스스로에 떠넘겨 버렸다.

그러니 남는 건 "복지부동" 타령이 될 수 밖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