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는 은행,70년대는 투자금융,80년대는 증권,90년대는 보험시대".
흔히들 금융업의 중심은 이렇게 변해왔다고 한다. 아울러 2천년대는 이들
업종이 혼합된 "유니버설뱅킹"이 주류를 이룰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은행의 시대"는 이미 흘러가 버렸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건 분명하다.
그러나 은행에는 아직도 60년대의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흘러가는 세태에 몸을 맡겨놓고 나몰라라하는 은행원도 많다. 금융환경은
급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금융환경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은행들의 자율화가 진전되고 금융개방이
이뤄질 전망입니다. 이제 은행원이 된 여러분들에게 우리 은행의 장래가
달려 있습니다..." 지난82년12월 어느날. H은행의 유모과장(41)은 신입
행원입행식에서 은행장의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힘이 넘쳐 나는 은행장의
"말씀"에서 은행원이 가지는 자부심을 물씬 느낄수 있었다. 급변하는 금융
환경에서 자신의 할일이 많다는걸 절감했음은 물론이고.

"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융환경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자율화의 진전은
책임경영을 강요하고 있고 금융개방의 가속화로 국내은행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들고 있습니다 ..." 그리고 지난1월3일. 금년 시무식에서 행장의 신년사
를 듣고 있었다. 행장의 목소리에 베인 자부심을 체감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급변하는 환경이라든가,자신의 할일이 막중하다든지 등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무덤덤하게 "시간아,빨리 가라"는 태도였다.
왜냐면 입행이후 14년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무식때도,창립기념식때도,체육대회때도. 모든 행사기념사의 시작은 "급변
하는 금융환경..."이었다.

그러다보니 이과장이 작성하는 보고서의 서두도 항상 같은 말이 돼버렸다.
"급변하는 금융환경"이니 "가속화되는 금융개방"이니. 과연 금융환경은 변
했는가.

변한건 사실이다. 하나은행의 박모차장(41)은 그걸 절감한다. 박차장이
은행원이 된것은 지난 83년. 제일은행에서였다. 처음 발령지는 서울남산
지점. 주거래처는 대우그룹이었다. 박차장은 남산지점에 간지 일주일만에
은행원이 된걸 참 잘했다고 판단했다. 신입행원이 왔다고 그룹자금부장이
주관,거창한 "만찬"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박차장의 파트너는
자금부과장이나 차장이었다. 돈을 가진 은행과 항상 돈이 아쉬운 기업이다
보니 역학관계는 뻔했다. 그러나 금융환경은 10년이 못가 변했다. "요즘
웬만한 기업의 자금담당자들은 행원급을 상대도 안하려고 해요. 행원의
파트너는 기껏해야 여직원이죠. 지점장도 어쩌다가 한번씩 자금담당임원을
만날수 있고" 이밖에도 변한건 많다. 조흥은행의 임대리(36)의 꿈은 은행에
들어올때만해도 은행장이었다. 못돼도 지점장은 멋들어지게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점장은 커녕 "조사역"을 모토로 산다.
인사적체가 심한 마당이라 지점장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지점차장
이나 대리도 권한은 없고 책임만 크다. 그래서 한직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은
편한 "조사역"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직장이니,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이니 하는 말도 인정하지 못한다. 행원급에게까지 실시되고 있는 명예
퇴직때문에 자리에 앉아있는게 편치 않은 날이 많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S은행의 P모상무. 그는 요즘 부하직원들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다. 뭘 하나 시켜놔도 제대로 하는게 없다. 품의서하나
딱 떨어지게 만들지 못한다. 어깨에 힘도 없고 패기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들이 입행했을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디에 내놔도 꿀릴게 없었고 실제도
그랬다.

그러나 P임원을 바라보는 행원들의 시각은 좀 다르다. 물론 자신들이
학력이나 능력이 떨어지는건 인정한다. 임원들이 은행원의 옷을 입은
60년대만해도 "은행원 전성시대"였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은행의 시대가 지난 만큼 우수한 인력이 몰려들지
않는다. 어디가서 은행원이라고 명함내밀기도 챙피하다. 그래도 임원들은
60년대에만 심취해 산다. 그때를 기준으로 부하들을 몰아치는것 같아
못마땅하다. 임원들이 하기 좋아하는 말로 금융환경은 급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금융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은행원도 예전의 은행원이 아니다. 실제
은행도 환경에 적응하기위해 발버둥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은행의 시대"에 들어온 은행원과 "보험의 시대"에 살고있는 은행원들의
의식은 조화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사고가 조화돼야만 "유니버설뱅킹"
시대를 리드할수 있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