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운동권 주역에서 이젠 나우콤등 4개 컴퓨터관련 회사를 거느린
컴퓨터업계의 숨은 실력자로 성장한 박성현사장.

올해 나이 37세로 아직은 젊은 기업가이지만 박사장은 길지 않은
인생살이에서 그 누구보다도 굴곡이 심한 인생을 살았다.

90년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동신정보통신을 설립,업계에 뛰어들기전까지
박사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80년대를 휩쓴 학생운동의 이론적 대부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대 정치학과 77학번인 그는 80년대 일어난 주요 학생운동에 항상
직간접으로 연결돼있었다.

80년당시 학생운동 최대조직이었던 무림의 5인 중앙위원회위원,81년 6월
방위복무중 학림사건에 연루돼 검찰구속,86년 제헌의회 사건때 5천만원의
자금지원으로 수배,1년 8개월의 지하도피 생활,그리고 정권교체에 따른
수배해제.

또 운동권학생들의 바이블 역할을 했던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수고와 레닌의
"나는 무엇을 할것인가"의 번역가로 알려져있다.

자신의 표현대로 좌파휴머니스트에서 자본주의사회의 최첨단산업인 정보
업체의 오너로 변신한 그는 80년대와 90년대를 가장 극적으로 살아온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해에는 부친 박철웅전조선대총장으로부터 상장회사인 고려시멘트를
물려받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창업한 컴퓨터회사에 더 큰
애착을 갖고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묻혀 지내면 시대에 뒤떨어집니다.
나우콤을 설립한 것은 정보화시대를 맞아 사회변혁을 앞당기기 위한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그의 운명
이라고 말하는 박사장은 80년대 학생운동으로 사회변혁에 힘을 쏟은
것처럼 정보화시대를 맞아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말한다.

"정보화란 전세계를 하나의 경제활동 환경으로 묶는것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은 국경을 넘어 영향을 받게됩니다.

세계적인 흐름인 정보화추세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일제36년과
마찬가지로 정보종속국, 나아가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기대할수
없습니다"

그가 초기 투자자본이 50억원이상 들어가는 나우콤을 큰 고민없이
설립한 것도 이러한 사명감때문이다.

PC통신 서비스회사인 나우콤은 지난 90년 설립된 동신정보통신,중대형
컴퓨터 판매업체인 동신정보시스템을 모태로 한것으로 "정보통신왕국"을
건설하려는 박사장의 야심을 보여준다.

지난 8월말 가입자 7만명을 넘어선 나우콤은 오는 10월 본격적인
상용서비스를 시작한다. 현재 직원은 70여명이나 조직확대를 계속,
내년초에는 1백명을 넘어설 전망이고 연간매출액도 1백50억원으로
흑자를 거둘 것으로 회사측은 전망하고 있다.

박사장이 정보산업에 관심을 가진것은 82년부터 시작된 2년반의 미국
유학생활에서였다. 학림사건에 연루된 그는 대학졸업을 포기하고
조지워싱턴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80년대초 미국에는 정보화혁명이 불붙고있던 때였습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라는 마르크시즘적 이분법을 갖고있던 저에게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혁명과 생산성 향상은 사고체제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습니다"

정보화사회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귀국후 각종 잡지에 정보화관련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이론을 소개해왔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정보산업의 발전에는기술발달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정보마인드를 갖는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정보마인드전파가 그의 임무중
하나라는 설명이다.

그가 국내에 처음 도입한 용어인 연성사회간접자본은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보인프라 건설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앞으로는 국가의
산업경쟁력은 정보인프라의 질적차이에서 결정된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2~3년간 안정화시기를 거쳐 90년대 하반기에는 하드웨어 생산에도 참여,
종합적인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할 것입니다"

박사장의 기업관은 독특하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 시민공동체사회를 건설하는 도구다. 이를위해 자신의 회사는
정보인프라 건설에 뛰어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병철전삼성그룹창업주와 김성곤전쌍용그룹창업주같이 승부수를 통해
기업을 일군 분들을 존경한다는 박사장은 자신도 정보통신에 승부를
걸어 한국기업사에 한획을 긋는 기업가가 되고싶다고 말한다.

<최인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