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물가를 정말 연간 6%이내로 다스릴 수있는 겁니까. 만약 못잡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자신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응분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 점 각오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22일 임시국회에선 이런 질문과 답변이 한참 오갔다. 질문을
하는 야당의원이나 답변에 임하는 정재석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이나
한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한쪽은 물가를 무슨 범인 체포하듯 하라고 다그치고, 다른 한쪽에선
"물가체포" 포도대장을 선뜻 자임한다. 정부총리가 취임초기 폈던
"물가현실화론"과는 한참 거리가 생긴 "장담"이었다.

청와대에서 한참 혼쭐이 난 뒤 "관리론자"로 옷을 1백80도 바꿔입기는
했지만. 8월23일 경제기획원 국.실장회의. 정부총리는 "물가안정을
위해선 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하라"고 지시했다.

"농림수산부 상공자원부등 관계부처가 농수산물 공산품등 소관품목별로
책임지고 가격을 안정시키라"고도 했다. 어쨋든 물가는 그가 "자리를
걸고" 장담했던 6%선을 위협하고 있다.

상공자원부나 농림수산부 관료들이 가격을 잡아보려고 업계관계자를
만나는등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지만 역부족인게 사실이다. 잇단 "규제
완화 시리즈"로 행정지도할 수단조차 없어진 마당이다.

정부총리가 "물가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틀뒤. 이번엔 김철수상공자원부
장관이 품목담당관회의를 소집했다.

안건은 수출"전망치"상향조정과 "초과달성방안". 올 수출을 당초전망치
보다 20억달러 늘린 9백20억달러가 되도록 수출총력체제를 구축해야한다는
독려가 이어졌다.

경기활성화로 수입이 걷잡기 어려울 정도로 늘고 있는데 따른 "반사작용"
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유는 다른데 있다. 당초 장담했던
무역수지흑자달성이 위협받게되자 부랴부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것이다.

숫자 컴플렉스-. 우리 경제장관들이 공통적으로 빠져있는 "증후군"이다.
무슨 정책이건 숫자로 정해진 목표를 내걸고, 그것을 "달성"하느냐
아니냐를 "업적"의 바로미터로 삼아 스스로를 얽맨다.

물론 경제정책에서 숫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숫자가 가져오는 효과
보다 지불해야 할 코스트가 많으면 "숫자"를 지키는 의미는 크게
퇴색된다.

물가상승률이 6%면 어떻고 6. 5%면 왜 큰 일로 받아들여져야 하느냐는
말이다. 왜 이런 상황이 빚어지고 있을까.

장관들이 오너(대통령)의 눈치를 너무 살피기 때문이라는게 경제관료들
내부의 "진단"이다.

대통령이 물가를 묶으라면 "숫자"부터 정해 그것에 "자리"까지 걸고,
규제완화에 박차를 가하라는 지시가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또 "예스"다.
정책의 일관성을 따질 겨를도 없어보인다.

이를테면 "야도이(고)컴플렉스"가 경제장관들에게 작동하고있다는 얘기다.
일반기업의 "야도이사장"들은 언제 자신의 목줄이 날아가버릴 지 모르는
"파리목숨"으로 비유된다.

마찬가지로 장관들도 대통령이 임면권을 휘두르는 "정무직"이다. 좀
비약해 말하자면 정무직 장관들의 "자리보전욕구"가 야도이 컴플렉스를
초래하고, 그것이 숫자컴플렉스로 이어진다고나 할까.

장관들이 이러니 차관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시리 돼있다는 뜻이다. 장관밑의 차관이란 자리는 흔히 "대통령밑의
국무총리"로 비유된다.

2인자라는게 항상 그렇지만 "바지저고리"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난
5월 경제기획원 재무부 농림수산부 상공자원부등에 이른바 "강성 소신파"
로 분류되는 차관들이 대거 등용됐지만 이들의 "색깔"을 찾거나 "목소리"
를 듣기 힘들다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것도 장관들의 자리보전
욕구가 그대로 차관들에게도 전이되고 있는 탓일게다.

장.차관들의 "야도이기질"은 또 있다. "머슴"처럼 바쁘다는 거다.
당정회의 경제장.차관회의 관계장.차관회의등 갖가지 회의에서부터
국내외관계인사 접견, 외부강연회 참석, 현장시찰등 각종 "행사"가
꼬리를 잇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요일 출근도 마다않는다. "일에 치여"
제대로 챙기지못하는 중요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실무자들의 브리핑을
받는 일은 주로 일요일에 이뤄진다.

"차분하고 원대한" 정책구상보다는 "숫자"를 정해 그것을 밀어붙이는
식의 "돌파행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야도이기질"이 빛을 발휘한 적도 있기는 하다. 개발연대때가
그랬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이 정도로 커진 상황에선 야도이기질이야말로
경제에 그늘을 지게할 뿐이다.

그 영향은 작게는 경제관료조직을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크게는 나라의
경제전체에 악영향을 끼친다는건 불문가지다.

마치 웃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옷전체가 헝클어지는 형국과 진 배없다.
바쁜 거야 그렇다고 쳐도 장관들이 차분히 "중심"만 잡아줘도 더이상
바랄게 없다는게 업계는 물론 부하관료들의 "희망사항"이다.

지금은 60,70년대의 경제장관들처럼 이 부처 저 부처를 돌아가며
"경제장관 재선은 기본이고 잘하면 3,4선도 할 수있었던" 때도
아니다(백영훈산업개발연구원장).

"안해본 사람은 몰라. 장관자리가 얼마나 좋은지를"이라는 6공시절
법무장관의 유명한 "독백"이 아직도 유효하게 느껴지는 걸까.

하지만 같은 6공시절의 어느 재무장관은 "하루를 해도 장관이고 1년을
해도 장관이다. 무엇때문에 소신을 펼치지 못하겠는가"고 "기염"을
토했던 적도 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않더라도 "단 하루를 해도" 족보에 "정승.판서"로
대대에 이름을 남길 것만은 분명하다.

오래 자리를 지키려다 오욕만 남기는 것보다는 "짧지만 굵게, 제대로
했다"는 평을 남기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