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든 B2(유동성조절자금)만은 막으시오. 모든 임원들이 영업점을
독려하고 안면있는 기업들에게 맨투맨으로 최대한 협조를 요청하시오"
(은행장)

"오늘이 고비입니다. 시장에 나올 콜자금은 뻔합니다. 따라서 승부는
(타점권)교환에 달려있습니다. 기업들에게 당좌대출을 억제토록 하고
기관들이 예금을 빼내가는걸 막아야 합니다"(Y상무)

"어제까지의 상황을 분석해본 결과 우리 은행은 교환싸움에서 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콜자금을 끌어와도 영업점에서 (당좌대출이)몇백억원씩
터지는 상황에선 어쩔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 영업점들로 하여금 교환
돌아온 수표를 면밀히 분석,실질적인 상거래에 의한것인지를 따지도록
해야합니다. 타점만 막으면 무사히 넘길수도 있습니다"(E이사)

5일 오전7시30분, S은행 은행장실. 평소보다 1시간정도 빠른 시간에 열린
임원회의 모습이다. 다른때 같으면 웃음소리도 날법 하지만 이날은 그렇지
않다. 경직돼다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결국 이날 회의는 3가지로
정리됐다.

"섭외망을 풀가동해 콜자금을 최대한 끌어올것, 당좌대출을 억제해 다른
은행에 밀리지 말것, 기업들에게 타점권이라도 예금을 요청할 것"등. 이
결과를 가지고 임원들은 흩어졌다.

회의를 마친 은행장은 자금부장을 찾았다. "투자금융사등으로부터 타입대
요청이 오면 나한테 돌리세요". 행장은 오늘도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이다.

전날도 그랬다. 타입대위기에 몰린 모투자금융회사로부터 "구조요청"이
왔다. 요청하는 타입대규모는 4백억여원. 평소의 관계를 봐선 무시할순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은행이 더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딱잘라 거절했다.

S은행에서 임원회의가 열리던 비슷한 시간. 국책I은행 은행장실에서도
자금관련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자금에 여유가 있는 농협이나 주택은행
으로부터 도와주겠다는 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자랄듯 합니다.
어떡하든 거래업체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습니다". 맨먼저 자금담당
H부행장보의 보고.

"나도 노력할테니 뛰어 봅시다. 명색이 국책은행인데 벌칙성자금을 지원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마침내 은행장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이런
회의를 오전에만 두차례. 그러나 결론이야 뽀죽할게 없었다. 최대한 돈을
빌려오고 빠져나가는 돈을 가능한한 억제하자는 것뿐.

회의를 마친 H부행장보는 전화통을 붙잡았다. 돈이 남는 은행에 "살려
주십쇼"라는 자세를 취할수 밖에. 그러나 그것만으론 안됐다.

대부분 은행이 모자라는 형편이고 돈이 남는 은행은 불과 2-3개. 그
사이에 다른 은행에 콜자금이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H부행장보는
은행을 나와 농협을 찾았다.

간단한 점심을 마치고는 주택은행을 방문했고. 그러나 두 은행으로부터
받은 대답은 "내일 두고 봅시다"였다. 이날 당좌대출이 얼마나 일어날지
모르고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지급준비금마감일인 내일에야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선적으로 빌려주마"는 격려성 약속을 받아낸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비슷한 회의와 상황은 이날 어느 은행에서나 있었다. 국책은행이나 시중
은행,대형은행이나 후발은행 다를게 없었다. 모든 은행의 회의 주재자는
은행장. 결론은 한결같았다.

"은행권 전체로 부족한 돈의 규모가 뻔한 이상 오늘 어떻게해야하느냐에
따라 은행간 명예가 판가름난다"는 것. 그리고 자금담당임원뿐만 아니라
모든 임원이 자기일을 접어두고 "올코트프레싱"에 나서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날 대부분 은행임원은 방에 없었다. 투자금융사,기업체,영업점
등이 임원들의 이날 근무지였다.

방법도 여러가지. "읍소"와 "협박"이 번갈아 동원됐다. 모르고 지내던
"학연"과 "지연"도 찾아냈다. 그래서 웬만한 기업체임원치고 은행임원
으로부터 "오늘 도와주지않으면 연을 끊어버리겠다"는 전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지준마감일을 이틀 앞두고 은행들에 "총체적 비상"이 걸렸다. 벌칙성
자금이나 과태료를 물지않으려는 치열한 눈치싸움이 극에 달한 탓이다.

그래서 은행임원은 물론 은행장마저 당당하기만하던 "체면"을 접어두고
직접 돈을 꾸러다니는 보기 힘든 현상이 연출되기도 했다.

돈가뭄이 극심했던 지난92년이후 근2년만의 일이다. 은행장 대부분은
전화에 의지했으나 모시중은행장은 직접 거래업체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은행들은 "벌칙성자금을 받는,자금준비도 제대로 못하는 은행"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이날 단내나게 뛰었다.

이들은 이 와중에도 "다음번에는 이러지않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같은 다짐이 현실화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통화당국이나
은행들이 현재와 같은 태도를 바꾸지 않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