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논현동 거평타운빌딩 19층에 있는 거평그룹 기획조정실은 요즘 텅
비어있다. 지난달 26일 인수가계약을 맺은 라이프유통에 대한 실사작업에
모두 파견됐기 때문이다.

인사담당들은 라이프유통사원들에 대한 개별면담으로 하루를 보내고,재정
경리담당들은 라이프유통재산에 대한 실사를 13일까지 마무리지어야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다. 회장비서실 역할도 하고 씽크탱크
기능도 해야할 기획조정실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거평그룹사원들은 최근 일련의 공격적인 기업인수로 회사이름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부담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인수에 따른 뒷처리작업에 몸은 고달픈데도 곳곳에서 "땅장사" "부동산
재벌" "자금출처 의혹" "특혜"등 갖가지 듣기싫은 소리들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거평그룹의 나승렬회장(49)은 회사안팎의 이런 움직임을 알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 결정하기까지는 수없이 주판알을 굴리지만 한번
결정한 후엔 뒷걱정없이 밀어붙이는 성격탓이다.

나회장이 최근에 보인 일련의 기업확장방식은 외형적으로는 지극히
공격적인 것이었다. "새우과 고래"의 언잖은 비유를 감내하며 대한중석을
인수했고 4차례나 유찰돼 아무도 사려는 이 없었던 라이프유통을 단독응찰,
전격 인수했다.

91년 5월 쓰러져가는 대동화학(현 거평)을 인수할 때도 주위의 만류를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그를 본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전략이 오히려 소극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제조업체를 갖고 싶은 꿈을 그는 창업대신 "남이 만들어
놓은 제조업"을 사들이는 방식을 택해 이루었고, 유통업에 본격 진출하려는
계획도 기존유통업체 인수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이제 더이상 공격적인 기업확장은 없을 것이란게 주위사람들의
분석이다.

나회장 스스로도 이제 내실을 다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계속된
기업인수에서 가장 많이 나돌던 말은 "부동산을 노리고 인수한 것"이란
것이다. 그래서 나회장은 특히 인수이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말표고무신으로 유명한 대동화학을 인수한 그는 적자가 누적되던 이
회사를 1년만에 흑자로 반전시켰다.

대한중석 인수후 나회장은 삼성출신의 양수제사장을 공채로 영입하고
6월에는 중간간부급 사원 35명에 대한 대폭승진인사를 단행,기존 사원들의
사기진작을 도모했다. 라이프유통 3백여 직원도 대부분 끌어안아 그들의
노하우를 창고형할인매장 진출에 십분활용할 생각이다.

특히 공기업민영화의 모범케이스를 만들겠다는 의욕으로 대한중석의 경영
정상화에 남다른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6월 공기업적 요소를 버리고
성장지향적 경쟁력확보에 초점을 맞춰 연구개발과 수출확대지원을 골자로
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지난달 대졸신입사원공채를 실시,이달중으로 사무직 50명,기술직 20명 등
총 70명의 신규인력을 보강할 계획이다.

지난달 초에는 나회장이 직접 중국을 방문,텅스텐 수입선인 민메탈사와
업무협의를 벌이기도 했다. 나회장은 중국측이 텅스텐인상추세를 늦추지
않을 경우 상동텅스텐광산채굴을 재개하거나 중국의 광산하나를
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곳곳에서 모인 "외인부대"는 항상 결속력이 문제다. 올들어
대한중석노조원들이 대폭적인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기존 거평식구들도
덩달아 회사측에 힘겨운 요구를 해왔다. 새로 한솥밥을 먹게된
라이프유통사원들도 이제 어떤 요구를 할 지 모를 일이다.

또 여전히 의사결정권이 나회장과 그의 장조카인 나선주(주)거평사장
두사람에게만 지나치게 집중된 것도 문제다.

거평그룹 임원들은 한번 회장실에 불려가면 "몇마디 듣지도, 몇마디
하지도"못하고 회장실을 나와야한다. 걸려오는 수많은 전화 때문에
대화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까지 회장이 만나고 처리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다. 권한의
대폭적인 하부이양이 없이는 주먹구구식 경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평이다.

회장 직속기구로 기획조정실이 마련됐지만 기획조정실 임원들로부터
회사돌아가는 얘기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계열사의 정보가
따로 놀고 한곳으로 취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평은 이제 거대조직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부수적 문제를 과제로 안고
중견그룹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제조업(대한중석)건설업(거평건설)
유통업(라이프유통)이 삼두마차의 외형을 갖췄다. 96년 완공을 목표로
구덕수중 부지에 짓고 있는 지하6층 지상22층의 의류도매센터도 분양율이
70%이상 진척됐다.

라이프유통을 포함 10개 계열사 1천5백여명의 종업원을 갖게 된 거평은
지난해 1천1백27억7천7백만원이었던 매출을 올해는 3천1백억원으로
늘여잡고 있다.

내실있는 성장을 거듭 99년엔 매출 1조원의 그룹으로 키우겠다는 나회장
의 야심찬 계획이 어느 정도 속도감을 보일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