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8월1일 상공부장관실. 정주영현대그룹회장과 김우중대우그룹회장이
당시 신병현상공부장관의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

며칠뒤 정부의 중화학공업조정및 통합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룹의
주력인 현대양행과 새한자동차(현 대우자동차"를 각각 내놓겠다는 각서를
썼다. 대우자동차 양보건은 나중에 없던 일이 되기는 했지만.

1994년 3월8일 상공자원부 대회의실. 기업계 인사들을 소집해 열린 이날
공산품 물가대책회의엔 불참자가 꽤나 됐다. 참석자의 면면도 이사급이
주류를 이뤘다. 이동훈차관이 가격인상 자제요청을 당부도 아닌 호소조로
말하는데도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대드는 기세가 역력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달라져도 이렇게까지..." 해도 너무
한다는게 전상우유통산업과장의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오늘의 현실
인걸. "조질 힘(규제수단)도 도와줄 힘(지원수단)도 없어진 마당에"(이건우
기계소재공업국장).

이런 현실을 외면할 경우엔 어떻게 되는가. 지난2일 상공자원부 기자실.
김효성석유가스국장은 장관실에서 결제를 받고 나오자마자 쌍용정유의
휘발유가격 인하조치에 대한 상공부방침을 발표했다. "원상회복 권고"라는
행정지도였다.

엇비슷한 시간 쌍룡정유회의실. 이 회사임원들은 다부진 결의를 했다.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품질과 가격에서 공정한 경쟁기틀을 다지겠다.
따라서 가격인하조치를 철회할 수는 없다"고. "앞으로도 소비자가 원하면
계속 휘발유값을 내리겠다"고 한술 더 뜨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정유업계는 가격인하경쟁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4일오전 상공자원부 기자실. 김태곤 3차관보가 나타났다. "상공자원부로서
는 쌍용정유의 최근 가격인하사태에 특별히 개입한 사실도 없고 개입할
의사도 없다"고 말했다. 김국장은 헛발질을 했고 김차관보는 헛발질에 대해
발뺌내지 변명을 한 것으로 볼 수있다. 어쨋든 이미 한바탕 헛발질을 하고난
뒤풀이였을 뿐이다. "상공자원부로서는" 망신살이 뻗쳐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상공관료들 스스로도 그렇게 말한다.

헛발질의 신호는 진작부터 일어났다. 정확히는 상공자원부가 업종전문화
시책을 발표한 지난해 10월부터다.

"대기업은 첨단산업의 경쟁력강화에 힘을 모아야하며 소비와 직접 연결되는
소매업을 주력업종으로 하는 것은 업종전문화의 기본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했을 때 벌써 그런 징후는 나타났다. 산업정책심의회가 백화점등 소매업도
주력업종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버린 것이다. 일부그룹이
고공플레이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때도 상공자원부측은 "천려일실
이었다"(정해 기획관리실장)는 점잖은 말로 해명했었다. 그 천려일실이
기름값 행정지도에선 헛발질로 악화된 것이다.

왜 이 지경이 됐는가. 그들이 대는 이유는 대충 이렇다. 개발연대때의
기업에 대한 자원배분이란 특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상공자원부는 80년대후반 기업들에 쿼터배정 자금지원등의 "당근"을
줄 수있도록 했던 8개분야 개별산업육성법이 폐지되면서 말발이 없어진게
사실이다. 게다가 기업을 무력시위로 다스릴 규제수단(채찍)마저 빠른
템포로 사라져가고 있다. 새정부들어 각종 규제완화가 강도높게 추진되고
있어서다. 그러나 이건 근인이다.

원인은 경제관료들 스스로의 정책개발능력이 약화된데다, 어쩌다 개발한
정책논리도 일관성을 결여한 때문이다. 이번 기름값 해프닝만 해도 "가격
인상 자제호소"를 할 때는 언제고 스스로 가격을 내리겠다는 기업에는
"과당경쟁을 유발한다"며 인하조치를 철회토록 압력을 넣는 모순을 범했다.

유식하다는 경제관료들의 이같은 자가당착을 "만족화사회의 방정식"으로
풀어 설명하면 어떨까. "미국이 너무 만족을 느끼다 일본에 당했고, 이번
에는 일본이 "이 정도면 됐다"고 하다가 다시 미국에 당하고 있다"는 어느
일본평론가의 진단처럼 말이다. 상공자원부는 "그래도 우리가 한마디
하면.."하는 자만감을 떨치지 못해 기업들에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 "만족화사회의 방정식"에 대입해보면 관료들이 선택해야 할 공식도
자명해진다. "기업은 찍어누르면 눌리는 것"이란 식의 안일한 발상, 다시
말해 자만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과 벌이 분명한 경기법칙을 적용하면서
공정하게 경기를 이끄는 레프리역할에만 충실해야 한다"(최원석동아그룹
회장)는 얘기다.

상공자원부는 우리나라 경제부처중에선 그래도 가장 국제화돼있고 서비스
마인드가 갖춰져 있다는 부처다.

그런 상공자원부조차 이 평범한 공식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경제
관료들도 미루어 짐작할 수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