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무일푼인 상태에서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가끔본다.
그러나 현대교역의 이광재사장(51)은 완전히 빈털털이 상태에서 단지
2달만에 어엿한 중소기업사장으로 떠오른 보기드문 경우이다.

지난 91년초의 일이다. 2년간의 실업자 생활로 끼니조차 어려운 이사장
에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향친구가 찾아 왔다. 8만원씩내는 단칸방
월세를 내지못해 전전긍긍하는 이사장에게 그 고향친구는 "요즘 건강기기
세일즈를 하면 잘된다던데."라는 말을 던진다.

이말에 솔깃해진 그는 70년대초 한때 영업사원으로 각종 생필품을 팔고
다녔던 기억을 더듬어 청계천과 성수동일대에 건강기기업체를 모두 찾아
나선다. 철저한 시장조사를 했다. 그는 이때 국산화돼나온 전기식발안마기
를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

"이 정도 상품이라면 잘 팔수 있겠다"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성수동에
있는 (주)케이투와 세일즈계약을 맺고 보니 이것을 팔 수 있는 마땅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고민끝에 결정을 내린 것이 서울시내 유명사우나
에서 상품을 팔아보자는 거였다. 그가 첫 장소로 정한 것은 여의도 63빌딩
지하에 있는 "63사우나". 일단 이곳을 찾아가 탈의실귀퉁이에서 건강기기를
판매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 91년 4월16일. 이날은 이사장이 정전기식
수처리회사를 다니다 그만둔 뒤 2년만에 새로 직장(?)을 얻은 날이다.

새벽5시,사우나에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발안마기 10대를 갖고가 2대를
탈의실 모퉁이에다 진열해놓고 손님들이 찾아와주길 기다렸다. 그랬으나
영업 첫날은 안마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거나 안마기에 발을 얹고 시험
가동을해본뒤 "아,시원하다"라는 말만 남길뿐 단한개도 팔지못했다.
다음날도 역시 새벽 5시에 나갔다. 열심히 상품에 대한 설명을 해댔다.
이날 그는 처음으로 발안마기 5대를 팔았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날듯이 기뻤다. 그럼에도 왠지 자꾸만 눈물이 고이는 것을 참을 길이
없었다. 오랫만에 자신의 능력으로 번돈으로 돼지고기 2근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세번째날은 무려 10대를 판다. 4월 한달동안 그는 총1백20대의 안마기를
판매하게 된다. 이 63사우나에는 "유명한 분들"이 많이 찾아오는 편이어서
그분들에게 안마기를 안내하면 백발백중이었다. 시인 구상씨를 비롯 유달영
박사등에게 발안마기를 팔았다.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안마의자 2개를 팔기도 했다.

둘째달에는 판매장소를 서교호텔사우나와 올림피아호텔사우나로 넓혀
가면서 6백대의 판매실적을 올린다. 당시 이 안마기1대를 팔면 약3만원
정도가 남았다. 그는 2개월동안 무려 2천만원의 돈을 번셈이다. 그는 이
돈을 고스란히 투자해 마포 서울가든호텔 뒤 근신빌딩에 16평규모의
사무실을 내고(주)현대교역이란 상호로 기업을 차린다.

빈털털이 실업자가 두달만에 사장이 된 것이다. 영업 및 관리직원 14명
으로 서울시내 각급호텔사우나등 25군데에 영업장을 차렸다. 이후 이 판매
회사는 8개월정도 대단한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상품제조원인 (주)케이투가 내부사정으로 도산을 한데다 독일
바이텍사로 부터의 안마기의 수입이 중단됨에 따라 사업이 심한 하강국면을
걷기 시작한다. 슬럼프가 계속되자 이사장은 지압형 안마기기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지압형안마기를 설계해놓고 보니
금형을 만드는데만해도 약1억9천만원의 비용이소요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철저한 시장조사과정에서 대전 대흥동에 있는 건강기기메이커가
일본에서 제작한 안마기금형을 헐값에 내놓은 것을 발견한다. 이 금형을
구입,망우리에 2백평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은 92년 5월의 일이다.
안마기의 브랜드를"바이오안마손"으로 정하고 롯데 미도파 신세계 현대등
15개백화점에 직매장을 낸다.

현재 구리시에 신공장을 설립중인 이사장은"중소기업이 단기간내에 급성장
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시장조사에 가장 힘을 쏟아야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판매장소의 설정이 정확해야한다"고 힘주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