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장안평 중고차 매매시장 모습. 사진=뉴스1
서울 성동구 장안평 중고차 매매시장 모습. 사진=뉴스1
올해 초 중고차를 구입한 20대 직장인 이모씨는 골치를 앓고 있다. 유명 중고차 플랫폼에서 약 500만원에 산 중고차는 한 달 만에 상태에 문제가 생겼다. 정비소를 찾은 이 씨는 130만원에 가까운 수리 견적을 받았다.

견적서에는 엔진오일 플러싱(엔진 내부 퇴적물 제거)과 교체부터 엔진오일팬 교환, 디스크 교환, 타이밍벨트 세트 교환, 댐퍼 풀리 교환 등의 항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씨는 "전 차주가 잘 관리했고, 최근 정비를 통해 소모품도 모두 교체했다는 설명에 차량을 구입했다"며 "점검표에도 외판 하나 교체만 적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정상이라고 적혔는데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씨의 사례와 같이 소비자에게 중고차의 정확한 상태를 알려주는 '중고차 점검기록부'의 태반이 허위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가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을 막고 유통업자들을 보호하는 사이 소비자의 피해만 늘었다는 분석이다.

14일 한국소비자연맹과 한국소비자원이 조사에 나선 결과, 중고차 시장에서 제공되는 '자동차 성능·상태 점검기록부(점검기록부)'의 절반 이상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소비자원은 지난 3~6월 온라인 자동차 커뮤니티를 통해 중고차 20대를 모집하고 점검기록부와 차량의 실제 상태를 비교했다. 그 결과 65%에 해당하는 13대 차량이 점검기록부와 다른 상태로 확인됐다.

소비자원이 자동차의 성능·상태를 객관적으로 비교·검증한 결과 20대 가운데 13대 차량은 프론트펜더, 도어 등 외판을 수리한 흔적이 발견됐다. 반면 차량의 점검기록부에는 외판부위 판금·도색 작업 이력이 기재돼 있지 않았다. 3대는 '특기사항 및 점검자의 의견’으로 일부 판금·도색 위치가 언급됐지만 10대는 수리 정보를 아예 적지 않았다.

중고차 15대 중 13대에서는 부품이 없었음에도 점검결과에서는 '양호'로 기록되기도 했다. 전기적으로 구동되는 조향장치(MDPS)가 장착된 차량에는 파워 고압호스 등의 부품이 달리지 않지만, 이런 부품이 정상적으로 달렸다고 허위 기재한 것이다. 차량 1대는 리콜 대상임에도 점검기록부에 리콜 대상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운전자 및 동승자 등의 안전과 직결되는 리콜 정보를 숨긴 셈이다.
한국소비자원이 중고차와 점검기록부를 확인한 결과 65% 차량은 수리 내역을 허위로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한국소비자원
한국소비자원이 중고차와 점검기록부를 확인한 결과 65% 차량은 수리 내역을 허위로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한국소비자원
결과가 이렇다보니 중고차 시장에 점검기록부 부실 문제가 만연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민단체 한국소비자연맹은 지난해 1372소비자상담센터에 접수된 중고차 관련 소비자 피해사례 5165건을 분석한 결과 시동 꺼짐·부품 하자 등 '성능상태 불량' 피해가 2447건(47.4%)으로 가장 많았고, 사고 이력을 충분히 알리지 않은 '사고이력 미고지'가 588건(11.4%)으로 뒤를 이은 것으로 집계했다.

소비자연맹은 이런 피해가 점검기록부가 부실하게 작성되는 탓에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점검기록부에 상태 표시 의무가 없는 배터리, 브레이크, 엔진 경고등 등의 부품이 불량한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차량에 이상이 없다는 점검기록부를 보고 구매했다가 소비자들은 수리비 폭탄을 맞는다는 게 소비자연맹의 설명이다. 또한 사고가 발생해 외판을 교체했어도 차량 프레임이 손상되지 않았다면 '무사고'로 규정하는 기준이 소비자 인식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다.

현재 자동차관리법 66조에는 자동차 성능점검자가 점검기록부를 허위로 작성하면 △30일 영업정지(1차) △90일 영업정지(2차) △권리 박탈(3차)등의 처벌을 한다는 규정이 있다. 매매사업자가 소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고지하는 경우에도 △30일 사업정지(1차) △등록 취소(2차) 등의 규정이 명시돼 있다.
리콜을 받아야 하는 차량의 점검기록부에 리콜 대상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 사진=한국소비자원
리콜을 받아야 하는 차량의 점검기록부에 리콜 대상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 사진=한국소비자원
하지만 현장에서는 점검기록부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소상공인 보호를 이유로 중고차 시장을 틀어막은 동안 벌어진 일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13년 중고차 판매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 대기업 진출을 막았다. 보호 기간은 2019년 2월 종료됐지만, 기존 매매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중기부가 생계형적합업종 지정을 검토하면서 시장을 2년 넘게 틀어막았다. 관련 특별법에 따르면 중기부는 지난해 5월6일까지 대기업 진출 허용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중기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사이 피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갔다. 올해 5월에는 인천의 매매업자에게 차량을 강매 당한 60대 소비자가 '중고차 매매 집단에 속아 생계가 어려워졌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에 따르면 인천에서 무등록 상사를 운영하던 매매업자들은 그를 8시간 동안 감금하고 강제로 대출을 받게 만든 것으로 조사됐다. 이 매매업자들에게 피해를 입은 소비자는 6명, 피해금액은 7875만원이었다.

소비자 사이에는 중고차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6개 시민단체가 연합한 '교통연대'가 진행한 중고차 시장 개방 온라인 서명운동에는 한 달이 채 안 돼 10만명 넘는 서명이 이뤄졌다. 시민단체 소비자주권시민회의가 전국 대학 경영·경제학과, 법학과, 소비자학과, 자동차학과 교수 254명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79.9%가 중고차 시장 개방에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