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오른쪽)과 박한우 기아자동차 사장이 22일 열린 ‘자동차산업 진단과 대응’ 간담회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오른쪽)과 박한우 기아자동차 사장이 22일 열린 ‘자동차산업 진단과 대응’ 간담회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업 특성상 야근과 잔업이 많은데 통상임금에 정기 상여금을 포함할 경우 연장근로 수당이 50%나 늘어납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3조원 규모의 통상임금 소송 1심 선고를 앞둔 기아자동차의 박한우 사장 목소리는 절박했다. 22일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서울 반포동 쉐라톤서울팔래스강남호텔에서 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진단과 대응’ 간담회에서 박 사장을 비롯한 자동차업계 경영자들은 한목소리로 “자동차산업 위기가 깊어지는 가운데 기아차가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하면 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협력업체에도 먹구름

"기진맥진 자동차업계… 통상임금 부담 더해지면 산업 생태계 무너질 수도"
박 사장은 “지난 수십 년간 노사 합의에 따라 통상임금에서 상여금을 빼고 임금 수준을 결정해 왔고, 근로자에게 임금도 줄 만큼 줬는데 노조가 신의를 뒤엎고 소송을 냈다”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차가 똑같이 일하고 임금도 똑같이 받는데 문구 하나 차이로 현대차의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고 기아차는 통상임금이라는 건 납득이 안 된다”고 호소했다.

현대차는 최근 2심까지 ‘월 15일 미만 근무자에게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고정성(다른 조건 없이 일한 만큼 지급)’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기아차에는 그런 규정이 없어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법조계에선 보고 있다. 통상임금은 야근·특근 등 연장근로의 기준 임금이다. 기아차에서 연 750%인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면 연장근로 수당이 대폭 상승한다. 패소하면 기아차는 일시적으로 3조원대 인건비 추가 부담도 안아야 한다. 박 사장은 또 통상임금 판결을 앞두고 본인 명의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을 노조가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데 대해 “30년 신의를 뒤엎은 노조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이라며 “피고 대표로서 재판부에 의견을 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용근 한국자동차산업협회장은 “지금도 자동차업계 인건비가 세계 최고 수준인데 통상임금 부담까지 더해지면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며 “그동안 노사가 정부 지침에 따라 통상임금 범위를 정해왔다는 점에서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입법을 해주길 간청한다”고 말했다.

기아차 협력업체인 영신금속(차량용 볼트업체)의 이정우 사장도 “사상 최악의 판매 부진에 완성차업체 파업과 통상임금 문제까지 겹치면 국내 부품사들은 모두 망하거나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규제 합리적으로 조절해야”

이날 간담회 참석자들은 일제히 한국 자동차산업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한계를 지적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지원을 호소했다. 김 회장은 “법 제도가 노조에 우월한 힘을 주는 반면 사용자는 대응 수단이 없어 파업이 관행화하고 있다”며 “노사관계 개선과 법 제도 정비를 위해 정부가 학계와 같은 중립적 전문가가 주도하는 노·사·정 협의 기구를 가동해달라”고 요구했다.

신달석 자동차산업협동조합 이사장(DMC 회장)은 “완성차 노조가 파업하면 협력업체는 당장 돈줄이 막히고 파업이 끝나면 물량을 맞추기 위해 특별수당을 줘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며 “매년 반복되는 파업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임금·단체협약 주기를 3년 이상으로 늘리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수욱 한국자동차산업학회장(서울대 경영대 교수)은 “한국 자동차산업의 규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규제 대응 비용이 늘어나면 경쟁력이 저하될 뿐 아니라 원천기술을 가진 해외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환경·안전 규제들을 합리적 수준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