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 이틀은 트라스테베레 지역에 숙소를 잡았는데 바로 이곳에 ‘산 프란체스코 다시시 아 리파’ 성당이 있었다. 다른 성당들만큼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을 주목한 이유는 베르니니였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베르니니라는 이름을 듣지 않을 방도는 없다. 나처럼 문외한인 사람이어도 여행 전 조금만 조사를 해보면 로마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는 베르니니의 작품들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고 사전 조사 없이 로마에 간다 해도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그의 이름과 만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작게는 명문가의 의뢰를 받고 만든 분수의 장식품부터 크게는 나보나 광장의 조각, 성 베드로 성당의 광장, 산탄젤로 다리 등과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유명한 조각 ‘아폴로와 다프네’, ‘페르세포네의 납치’ 등 대단한 업적을 남긴 그의 이름과 작품은 로마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눈과 귀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작품 중 하나가 트라스테베레의 작은 성당인 ‘산 프란체스코 다시시 아 리파’ 성당에 있다고 하는데 마침 숙소 근처여서 가장 먼저 이곳에 가보았다. 오래된 작은 성당은 다른 성당들과는 달리 미사를 드리는 사람도 없이 조용한데 늘어뜨려진 플래카드에 ‘베르니니’의 이름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듯 보여 들어갈까 말까 하고 있는데 체구가 자그마한 분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다가온다. 성당의 신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성당 내부를 안내해 주신단다. 그렇게 따라 들어간 곳에 베르니니의 조각 ‘축복받은 루도비카 알베르토니’가 있었다.
베르니니의 '축복받은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 사진. ⓒ 신지혜
신부님은 알아듣기 쉽게 쉬운 영어로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는데 언뜻 보면 황홀경에 빠진 듯 누워있는 이 여인은 루도비카 알베르토니이며 귀족 출신의 무척 부유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난 후 루도비카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트라스테베레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산 프란체스코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생을 바친 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구제와 봉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단체이므로 루도비카 알베르토니는 그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자산을 구제에 사용했다. 황홀경처럼 보였던 루도비카의 모습은 이런 신앙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루도비카를 복자로 정했고 이에 알베르토니 추기경이 베르니니에게 조각을 의뢰했는데 베르니니 또한 이 숭고한 정신에 대가를 받지 않고 작업했다고 한다.
자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타인을 위해 그것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구제와 봉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보다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앞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던 성인 프란체스코의 길을 따라 간 루도비카의 모습은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고개를 숙이게 한다.
산 프란체스코 다시시 아 리파 성당 내부. / 사진. ⓒ 신지혜
‘산 프란체스코 다시시 아 리파’ 성당의 신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수 세기 전 트라스테베레의 루도비카를 가깝게 느끼게 했고 도슨트가 되어주신 신부님께 감사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짧은 도슨트가 끝나고 신부님은 우리 가족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셨는데 그 감동은 실로 대단했고 그 일로 인해 로마는 더없이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다소 장황하게 개인적인 경험을 쓴 이유는 산 프란체스코를 이야기하기 위함인데 13세기 초 아시시 출신의 성인 프란체스코는 병자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헌신한 성인으로 자신과 제자들은 그저 겉옷 한 벌과 허리띠만을 가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남은 생을 살았다. 글자 그대로 성경의 구절처럼 살아간 것이다.
바로 그 프란체스코에 대한 영화가 있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이끈 감독 중 한 사람이며 잉그리드 버그만과 결혼해 세기의 관심을 받았던 로베르토 로셀리니 연출의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이다.
영화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스틸 컷. / 영화공간 제공
이 영화는 한 성인에 대한 위인전적인 작품이 아니다. 그의 영적 체험이나 기독교를 전파하려 설교하는 모습이 담겨 있지도 않다. 부유하고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청산하게 된 극적인 회심도 없고 극영화의 특성조차 희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1950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제74회 칸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프랑수와 트뤼포 등 영화계의 거장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 작품은 극적인 연출과 효과를 배제하고 무소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정신을 그대로 따라가려 했던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오래된 성화를 한 장씩 넘겨보는 듯하게 단편적인 챕터들로 구성해 오히려 차분하고 사색적인 경험을 하게 만든다.
줄거리로 이어지는 이야기라기보다 짧은 사건들을 하나씩 병렬배치 함으로써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옛 성인들의 에피소드를 하나씩 듣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인상이 하나씩 쌓이면서 관객들은 차차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에피소드들도 거창한 것이 아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이 자신들의 허름한 오두막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낯선 이가 점령해버렸고 오히려 수사들을 쫓아낸다. 그들은 묵묵히 돌아서서 다시 비바람 속으로 떠난다.
영화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스틸 컷. / 영화공간 제공
프란체스코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쥬니페로는 가난한 자를 만나 한 벌뿐인 자신의 튜닉을 벗어주고 덜덜 떨며 돌아온다. 선한 마음을 가진 쥬니페로는 몸이 아파 누워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형제를 위해 돼지의 발을 자르기도 하고 설교를 하러 떠났다가 잔인한 폭군과 그 무리를 만나 고초를 겪지만 그의 맑은 눈과 평온한 태도에 감동한 폭군은 군중을 해산하고 떠나가기도 한다.
밤새 기도하던 프란체스코 앞에 나병환자가 나타나고 그 모습에 크나큰 슬픔을 느낀 프란체스코는 눈물을 흘리며 남자를 안아주고 보내준다. 당시 가장 낮은 자였던 나병환자를 바라보면서 끓어오르는 슬픔과 연민을 이기지 못하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은 마음을 울린다.
마지막 챕터, 수사들은 설교 여행을 떠나며 자신들의 소박한 터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어준다. 도시에 도착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을 그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들려주고는 각자 방향을 정해 피사로 시에나로 피렌체로 폴리뇨로 떠나가는데 프란체스코는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가 평화를 전하라’고 당부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함께 비바람을 뚫고 찬송을 부르며 오두막으로 향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 그들은 찬송을 부르며 각자의 방향으로 한 사람씩 흩어지는데 이 광경은 단순히 기독교의 전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상을 구현하러 떠나는 수사들의 단순하고 원초적인 정신으로 인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영화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스틸 컷. / 영화공간 제공
그렇다면 이 영화를 통해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영화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의 보도자료를 인용해 보자.
“이 영화는 로셀리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난에서 얻는 자유, 물질로부터의 철저한 분리”에 초점을 맞춘다. 로셀리니는 이러한 프란체스코적 기쁨과 무소유의 정신이야 말로 “그리스도교 이상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다”고 생각했으며 영화 속에서 “원초적 프란체스코주의의 향기”를 담아내려 했고 그 결실은 작고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영화이다.”
13세기 초, 바보 성자, 미치광이 성자로 불렸던 프란체스코. 축일 미사에 참석해 마태복음의 말씀을 듣던 중 회심하고 문자 그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려두고 튜닉과 허리띠만 가지고 구제와 봉사의 삶을 시작한 그. 그와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에 비견되곤 하는데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살아갔던 그의 모습은 실로 구도적이다. 구도적인 것은 종교적인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도는 종교적 신념이나 규범을 넘어서서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삶에 대한 고심이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과 그의 실천으로서의 봉사와 희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신에 대한 갈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은 그런 면에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타인에 대한 사랑을 극적으로 실천한 구도적 인간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예수와 가장 닮은 삶을 살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는데 스스로의 삶을 단순화하고 가장 낮은 곳에 마음을 두어 타인의 삶을 돕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전달하고 가장 강렬하게 실천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이 영화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는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