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존버'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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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시연 숙명여대 총장
살다 보면 피하고 싶은 사람, 견뎌야 하는 회의, 지나가야 하는 시간이 있다. 입시 때와 박사 논문을 쓸 때가 그랬고 아플 때, 잔소리를 들을 때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또한 다 지나갈까?
참는 건 패배 같고 견디는 건 짠하지만, 결국 사람은 그런 시간 위에 자신을 세운다. 원래 존버는 ‘존나 버틴다’의 줄임말로 주식판이나 게임에서 쓰이던 속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청년들의 일상으로 파고들며 의미가 확장됐다. 불합리한 상황, 불투명한 미래, 말뿐인 성장 속에서 “존버 중입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참음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감정을 농담처럼 비트는 생존의 언어다.
Z세대는 “참으면 복이 온다”는 말에 위로받지 않는다. 복이 오기 전 탈진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버티는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말을 택했다. 거칠지만 유쾌한 존버는 힘겨움 속 웃음을 만든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오늘도 존버 중”이라는 글 한 줄에 수십 개의 ‘좋아요’와 댓글이 달린다. 서로의 버팀을 알아보고 말없이 응원하는 문화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고통 속에서도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남아 있다”고 말했다. “저 지쳤어요”보다 “존버 중이에요”가 더 가볍게 들리는 이유다. 힘든 상황을 농담처럼 표현하는 순간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고 태도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프랑스 영화 ‘신난다, 부모님이 이혼한다’가 떠오른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혼은 큰 충격이지만 이 영화는 학급 모든 학생의 부모가 이혼했다고 설정했다. 죄책감에 잘해주는 부모를 부러워하던 한 초등학생은 부모를 이혼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우리 부모도 이혼한다!”고 외치며 해맑게 운동장을 뛰어간다. 비극을 유머로 반전시킨 장면이다.
이제는 누구나 조금씩 존버 중이다. 입시 앞의 수험생, 불안한 노동시장에 선 청년, 정시에 퇴근하지 못하는 직장인, 매출 감소에 시달리는 자영업자, 긴 치료 과정의 환자까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보다 “이 또한 존버하자”가 더 현실적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어떻게 버티는가, 그리고 그동안 나를 잃지 않는가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액체 사회’라고 불렀다. 오래 버틸 기반 없이 흔들리는 시대, 존버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기술이자 정체성 유지 방식이 된다. 내가 누구인지는 지금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로 설명되는 시대다.
버틴다는 건 멈춤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다. 언젠가 상황이 바뀌었을 때 여전히 ‘나’로 서 있도록 지켜내는 일이다. 그래서 존버는 패배의 언어가 아니다. 희망을 연기하는 기술이자 나를 잃지 않는 생존 감각이다. 어쩌면 우리가 버티는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나로 남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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