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세계를 품은 메종, 파리의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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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섭의 음미(美)하다]
파리에 위치한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
19세기 대표 화가 귀스타브 모로
유화, 스케치, 데생 및 수집품 등 25,000여개 작품 전시
<주피터와 세멜레>, <프로메테우스> 등
모로 최전성기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
파리에 위치한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
19세기 대표 화가 귀스타브 모로
유화, 스케치, 데생 및 수집품 등 25,000여개 작품 전시
<주피터와 세멜레>, <프로메테우스> 등
모로 최전성기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
자유, 평등, 박애 위에 쌓아 올린 아름다운 엄격함, 파리
도시나 공간을 지배하는 ‘규율’이 있다. 그 규율은 암묵적으로 우리의 행동과 의식 세계를 지배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미술관과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공간과 암묵적으로 ‘합의한 약속’이다. 콘서트홀에 모인 관객들은 함께 노래하거나, 조용히 연주를 감상한다. 아티스트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공간이 제공하는 규범과 맞아떨어진 경우다. 때론 이런 규율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순간으로 다가오지만, 그 공간과 장소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다잡아 주기도 한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는 엄격한 규율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궁전 같은 곳이다. 1구역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방사하는 복잡하면서도 체계적인 도시 구조, 19세기 오스만 남작이 파리의 도시 계획으로 고수했던 규칙적인 건물의 높이, 와인 등을 마실 때 서로 눈을 마주 보고 건배하는 매너, 식당에서 웨이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인내, 팰리스 호텔의 미슐랭 레스토랑이 요구하는 드레스 코드와 RSVP 등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규율이 도처에 존재한다. 깊숙이 들여다볼수록 깐깐하고, 엄격하며,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파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파리에 꽤 자주 왔다. 처음엔 마냥 자유분방하게 여겼던 이곳은 어느덧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문화·예술 놀이터로 변해 나를 끌어당겼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파리에 방문할 때마다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이 도시로 스며드는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에 방문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먹을 것 천지인 파리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올 때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는 나에게 처음으로 예술가가 걸어온 치열했던 시간과 쉽게 범할 수 없는 창의적 상상력을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해줬던 곳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징과 에로티시즘적 은유
귀스타브 모로가 살던 공간이자, 창작의 요람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거대한 화폭에 그려낸 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낭만주의와 에로티시즘, 비극과 희극의 경계 어딘가에서 그는 다층적인 이야기와 인물들의 심리를 독창적인 화법으로 표현해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나 그리스 신화의 극적 소재는 모로가 수없이 습작하고, 완성한 그림들의 모티브다. 미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모로는 르네상스 직후의 마니에리즘의 복잡한 구성과 유미적 요소, 카라바조를 근간으로 태동한 바로크의 스케일, 그리고 18-19세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서 나타난 대범한 감정의 표현과 색채를 모두 품고 있는 작가다.
즉, 르네상스 이후 모든 미술 양식의 총체적 집합체가 귀스타브 모로인데, 자신이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작가는 이웃이었던 두 명의 미술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와 테오도르 샤세리오(Theodore Chassseriau)였다고 한다.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은 그와 가족들이 함께 살았던 집이며, 작업 공간이기도 했던 아틀리에다. 모로의 아버지가 1853년 이 터에 타운하우스를 구입했고 꼭대기 층을 작업실로 개조하면서 건물 전체를 쓰게 되었다. 그는 하늘나라로 가기 몇 해 전인 1895년에 건축가 알버트 라폰에게 이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지금까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터의 명맥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 1층에는 모로 가족이 생활한 공간을 복원해놨고, 살면서 그가 수집한 도기, 그림, 직접 제작한 가구, 습작했던 마티에르 등을 빼곡하게 전시해놨다. 그중에서는 모로 가족의 초상화와 함께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등이 기증한 작품도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수천 점이 넘는 스케치, 습작과 세필로 일궈낸 거대한 창작물들, 그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이 뮤지엄에 가득 차 있어 처음 들어가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거대한 화폭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인물들은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녹여 굉장히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마치 신화의 등장인물이 모로의 손에서 재창조되어 살아난 듯한 느낌마저 든다. 2층과 3층에서 모로의 주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3층은 모로가 생전 그림을 그렸던 화실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유화 1,000여점과 스케치, 데생 7,000여점이 있으며,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에 속한 그의 수집품과 그림들을 포함하면 전부 25,000여개의 작품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귀스타브 모로는 이 전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주피터와 세멜레>, <프로메테우스> 등
귀스타브 모로의 최전성기 작품들을 고스란히 대면하는 공간
세상 끝의 경계선인 코카서스 산과 그 너머의 세계를 대기 원근법으로 처리한 것, 독수리가 머리를 쳐들어 간을 포식하는 장면을 역동적이고 잔혹하게 묘사한 것,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한 것이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다. 이 작품으로 모로는 1869년에 살롱에서 메달을 수상했지만, 잔인한 묘사로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화적 세계를 품은 메종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은 파리의 다른 뮤지엄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모로가 이곳에 남겨놓은 신화적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 광활하고, 창대하다. 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했던 순간들이, 시간이 흘러도 용광로의 열기처럼 뜨겁게 남아있는 공간이 바로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이다.
“내 두뇌와 이성은 덧없고, 의심스러운 현실 같으며… 내면의 감정만이 영원하고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던 귀스타브 모로는 구상에 있어서 자유를, 표현과 색채에 있어서 정열을 추구했다. 동시대 다른 어떤 아티스트보다 선견지명이 있었고, 초현실주의적 광기와 현실적 열기를 조율할 줄 알았으며, 실용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조르주 루오(Georges Henri Rouault)에게 스승이자 비전이었던 사람이 바로 귀스타브 모로였다.
“귀스타브 모로는 우리가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파리=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
도시나 공간을 지배하는 ‘규율’이 있다. 그 규율은 암묵적으로 우리의 행동과 의식 세계를 지배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미술관과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공간과 암묵적으로 ‘합의한 약속’이다. 콘서트홀에 모인 관객들은 함께 노래하거나, 조용히 연주를 감상한다. 아티스트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공간이 제공하는 규범과 맞아떨어진 경우다. 때론 이런 규율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순간으로 다가오지만, 그 공간과 장소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다잡아 주기도 한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는 엄격한 규율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궁전 같은 곳이다. 1구역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방사하는 복잡하면서도 체계적인 도시 구조, 19세기 오스만 남작이 파리의 도시 계획으로 고수했던 규칙적인 건물의 높이, 와인 등을 마실 때 서로 눈을 마주 보고 건배하는 매너, 식당에서 웨이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인내, 팰리스 호텔의 미슐랭 레스토랑이 요구하는 드레스 코드와 RSVP 등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규율이 도처에 존재한다. 깊숙이 들여다볼수록 깐깐하고, 엄격하며,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파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파리에 꽤 자주 왔다. 처음엔 마냥 자유분방하게 여겼던 이곳은 어느덧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문화·예술 놀이터로 변해 나를 끌어당겼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파리에 방문할 때마다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이 도시로 스며드는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에 방문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먹을 것 천지인 파리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올 때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는 나에게 처음으로 예술가가 걸어온 치열했던 시간과 쉽게 범할 수 없는 창의적 상상력을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해줬던 곳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징과 에로티시즘적 은유
귀스타브 모로가 살던 공간이자, 창작의 요람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거대한 화폭에 그려낸 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낭만주의와 에로티시즘, 비극과 희극의 경계 어딘가에서 그는 다층적인 이야기와 인물들의 심리를 독창적인 화법으로 표현해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나 그리스 신화의 극적 소재는 모로가 수없이 습작하고, 완성한 그림들의 모티브다. 미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모로는 르네상스 직후의 마니에리즘의 복잡한 구성과 유미적 요소, 카라바조를 근간으로 태동한 바로크의 스케일, 그리고 18-19세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서 나타난 대범한 감정의 표현과 색채를 모두 품고 있는 작가다.
즉, 르네상스 이후 모든 미술 양식의 총체적 집합체가 귀스타브 모로인데, 자신이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작가는 이웃이었던 두 명의 미술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와 테오도르 샤세리오(Theodore Chassseriau)였다고 한다.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은 그와 가족들이 함께 살았던 집이며, 작업 공간이기도 했던 아틀리에다. 모로의 아버지가 1853년 이 터에 타운하우스를 구입했고 꼭대기 층을 작업실로 개조하면서 건물 전체를 쓰게 되었다. 그는 하늘나라로 가기 몇 해 전인 1895년에 건축가 알버트 라폰에게 이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지금까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터의 명맥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 1층에는 모로 가족이 생활한 공간을 복원해놨고, 살면서 그가 수집한 도기, 그림, 직접 제작한 가구, 습작했던 마티에르 등을 빼곡하게 전시해놨다. 그중에서는 모로 가족의 초상화와 함께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등이 기증한 작품도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수천 점이 넘는 스케치, 습작과 세필로 일궈낸 거대한 창작물들, 그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이 뮤지엄에 가득 차 있어 처음 들어가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거대한 화폭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인물들은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녹여 굉장히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마치 신화의 등장인물이 모로의 손에서 재창조되어 살아난 듯한 느낌마저 든다. 2층과 3층에서 모로의 주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3층은 모로가 생전 그림을 그렸던 화실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유화 1,000여점과 스케치, 데생 7,000여점이 있으며,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에 속한 그의 수집품과 그림들을 포함하면 전부 25,000여개의 작품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귀스타브 모로는 이 전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주피터와 세멜레>, <프로메테우스> 등
귀스타브 모로의 최전성기 작품들을 고스란히 대면하는 공간
호색한으로 유명한 제우스(주피터, 신들의 신)가 세멜레에게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죽음의 강’ 스틱스(Styx)를 걸고 맹세한다. 남편이 바람 핀 사실을 알게 된 아내 헤라(유노, 결혼과 수호의 신)는 제우스를 벌할 수 없는 위치인지라 유모로 변신해 세멜레를 벌하려 한다.귀스타브 모로는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이 순간을 수많은 구상작업과 스케치를 통해 약 7년에 걸쳐 작품 <주피터와 세멜레>(1895년경)로 창조해냈다. 얼핏 보면, 인도 간다라 미술 같기도 하고, 페르시아 신화 같은 이 그림은 수많은 상징들과 알레고리로 장식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인물이나 피사체의 선명했던 윤곽이, 가까이서 보면 경계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는 수많은 세필로 덧칠하고, 연구한 귀스타브 모로 특유의 그림 양식이기도 하다. 대기 원근법적인 요소를 인물에게 적용한 이런 효과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오브제들 간의 신비성을 더하고, 그림 자체의 심미성을 극대화시켜준다. 신의 전유물이었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 그는 제우스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대가로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낮에 쪼아 먹힌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밤사이에 다시 돋아났고, 그러면 이튿날 독수리가 다시 와서 그의 간을 다신 쪼아 먹었다는 이야기는 1868년 작 <프로메테우스>에서 초현실주의적 극사실주의로 묘사되어 있다.
유모로 변신한 헤라(유노)는 “요즘 사기꾼들이 많으니, 당신이 사랑하는 저 자가 진짜 제우스 신인지 확인해보세요. 진짜라면 번개 부리는 모습을 보여 줄 겁니다.”라고 세멜레를 자극한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애원하게 되고, 제우스는 자신의 모습을 세멜레에게 보여준다.
신의 광휘와 번개를 몰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제우스. 인간의 모습으로 신의 광영을 대면할 수 없었던 세멜레는 제우스의 모습을 보고 고스란히 타 죽게 된다. 이때 세멜레가 임신한 상태였는데, 제우스는 세멜레의 몸에서 태아를 꺼내 허벅지에 넣고, 남은 달을 채운 후 아이를 태어나게 한다. 바로, ‘포도주, 포도나무, 풍요 그리고 황홀경’을 관장하는 신 ‘디오니소스(Dionisos/Baccus)’가 탄생하는 순간이다.-그리스 신화 中 [세멜레 이야기] 발췌
세상 끝의 경계선인 코카서스 산과 그 너머의 세계를 대기 원근법으로 처리한 것, 독수리가 머리를 쳐들어 간을 포식하는 장면을 역동적이고 잔혹하게 묘사한 것,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한 것이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다. 이 작품으로 모로는 1869년에 살롱에서 메달을 수상했지만, 잔인한 묘사로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화적 세계를 품은 메종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은 파리의 다른 뮤지엄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모로가 이곳에 남겨놓은 신화적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 광활하고, 창대하다. 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했던 순간들이, 시간이 흘러도 용광로의 열기처럼 뜨겁게 남아있는 공간이 바로 귀스타브 모로 뮤지엄이다.
“내 두뇌와 이성은 덧없고, 의심스러운 현실 같으며… 내면의 감정만이 영원하고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던 귀스타브 모로는 구상에 있어서 자유를, 표현과 색채에 있어서 정열을 추구했다. 동시대 다른 어떤 아티스트보다 선견지명이 있었고, 초현실주의적 광기와 현실적 열기를 조율할 줄 알았으며, 실용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조르주 루오(Georges Henri Rouault)에게 스승이자 비전이었던 사람이 바로 귀스타브 모로였다.
“귀스타브 모로는 우리가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 앙리 마티스
파리=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