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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이용훈을 처음 만난 건 2010년 연말 뉴욕에서였다. 당시 나는 뉴욕 특파원 임기 첫해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소재로 뉴스에 리포트를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한국인 테너가 주연으로 데뷔하게 되자 극장 측에서 취재요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메트(MET)를 빛낸 위대한 가수들의 사진 앞에서 새로운 한국인 주연 테너를 단독 인터뷰하는 기분은 음악애호가의 한사람으로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를 만난 첫인상은 ‘오, 조인성 느낌이 나는데?’였다. 리포트가 방영된 뒤 지인들에게 그렇게 얘기를 하면 ‘에이, 그건 좀 오버다~ㅎㅎ'라는 반응을 듣곤 했지만, 나는 이후로도 쭉 이용훈 이름 앞에 ‘오페라계의 조인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키 크고 잘생기고 연기력도 좋았기 때문이다.

당시 MET에서 그는 <파우스트> <돈 카를로> 등의 고뇌하는 주인공을 맡아 갈채를 받았다. 객석에서 옆에 앉은 뉴욕 할머니들은 “어쩜 저렇게 연기며 노래며 훌륭하냐, 오래오래 보고 싶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우리나라 가수예요. 얼마 전에 만나서 인터뷰했어요!”라고 자랑하며 뿌듯해했다. 요나스 카우프만과 더블 캐스팅인 경우가 많았는데, 노래와 연기로는 밀리지 않았다는 게 당시 나의 감상이었다.

[당시 필자의 기사] ▶▶▶ 오페라 주연, 동양인은 안돼? 한국 테너가 일냈다 (SBS 8뉴스 2010.12.13)

2010년 인터뷰 당시 이용훈은, 동양인으로서 주인공 배역을 차지한다는 것에 대해 필자와 한참 얘기를 나눴다. 주인공 테너는 작품 내적으로는 여주인공의 연인, 작품 외적으로는 홍보의 간판이다 보니, 오페라 세계에서 인정을 받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어쨌든 동양인 남성으로서 뉴욕 바닥을 돌아다니던 처지라, 그의 힘듦과 고뇌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이용훈이 <오텔로>의 주인공으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선다길래 내심 기대했다. 지난해 10월 <투란도트>를 통해 MET 주연의 위용을 고국에 선보이긴 했지만, ‘오텔로'역이 그의 캐릭터 표현 능력을 더 잘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오텔로가 품고 있었을 콤플렉스를, 이용훈은 다른 서양인 테너들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8월22일(목) 공연에서 본 이용훈은 과연 기대했던 대로였다. 스스로를 파괴해가는 오텔로의 모습을, 그는 처절하고 실감 나는 연기로 표현해냈다. 3층 객석에서 얼굴 표정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상대 배역의 멱살을 잡는 타이밍과 각도 하나도 허투루 연기하는 구석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이제 50대 중반인 그의 얼굴에서 조인성 닮은 느낌은 많이 사라졌지만, 연기력은 조인성 뺨칠 정도였다.

마지막에 데스데모나의 얼굴을 베로 덮어 질식사시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의 연기는 너무 리얼해서 무대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청중이 그런 끔찍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연출가의 의도였을 텐데, 이용훈의 연기는 연출가의 뜻을 완전하게 구현해내고 있었다. 더욱 대단한 건 노래를 하면서 이런 연기를 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텔로> 커튼콜에 나온 이용훈(가운데). 2024년 8월 22일 예술의전당 / 사진. 필자 제공
<오텔로> 커튼콜에 나온 이용훈(가운데). 2024년 8월 22일 예술의전당 / 사진. 필자 제공
이용훈의 가창에서는 전설적인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의 향기가 났다.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그의 음성엔 상처 입은 수컷의 울부짖음이 묻어났고, 금관처럼 뿜어내는 고음엔 흑단 같은 어두운 빛깔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최대음량으로 지르지 않는 구간에서도 오텔로의 영혼이 갉아 먹히는 과정을 실감 나게 그려낼 수 있었고, 소리를 지를 때와 소리를 죽여 흐느낄 때의 대비가 빚어내는 긴장감에 내 손에선 땀이 났다.

도밍고가 더 이상 오텔로를 부를 수 없는 이 시대에, 오텔로 배역을 이만큼 노래하고 연기해낼 테너가 얼마나 있을까? 이용훈이 앞으로 더 많은 세계 유수의 극장에서 오텔로를 노래하고, 영상물도 발매되기를 바란다. 지난번 글에서 소개한 클라이버 지휘-도밍고 주연의 오텔로 dvd 옆에 이용훈 주연의 오텔로 블루레이를 소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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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식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