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면 감천… 1935년 판 <영랑시집>을 보게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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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김윤식 시집 <영랑시집(永郞詩集)>, 시문학사, 1935년 11월 5일 발행
맑고 깨끗한 서정과 활자미학의 극치를 만나다
김윤식 시집 <영랑시집(永郞詩集)>, 시문학사, 1935년 11월 5일 발행
맑고 깨끗한 서정과 활자미학의 극치를 만나다
90년 세월을 견디고 나타난, 시문학파 시인 김영랑의 첫 시집
드디어 만났다. 지난 1월, 1956년 판 <영랑시선>을 소개할 때만 해도 내가 직접 1935년 판 <영랑시집>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948년에 초판이 발행되고 1956년에 재발행된 <영랑시선>이 영랑의 작품 중에서 골라 엮은 것이라는 점에서 <영랑시집>은 어찌 보면 김영랑 시인의 본격 시집으로는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련 칼럼) 미당 서정주가 홀딱 빠져 발문까지 써 준 시집의 1956년판
하물며 비슷한 시기 같은 출판사에서 <정지용시집>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시집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리고 이 두 시집은 2009년 국가유산청에서 근대문학 유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귀한 시집을 만난 것은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고서점을 운영하는 분의 소개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90년 세월이 무색하게 고고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었다.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1903~1950)은 1903년 1월 16일에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부농(富農)이었던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슬하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봄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고,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4세의 나이에 혼인했으나 1년여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이처럼 영랑의 생애와 문학에 있어 그의 고향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의 생애 중 7년 정도의 유학 기간과 말년 2년여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제외하면 40년 가까운 세월을 고향 강진에 머물면서 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를 썼으니 말이다.
1916년 2월경 상경하여 1년 남짓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한 영랑은 이듬해 3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진학한다.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같은 학년에 이승만(李承萬) 화백 등이 있어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봄,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여 옥고를 치렀고, 그 여파로 결국 휘문의숙을 중퇴한다.
1920년 9월 일본 동경 청산학원(靑山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면서 의미 있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때 그의 문학적 동반자이자 훗날 후원자가 되는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1904~1938)을 만났기 때문이다. 영랑과 용아는 같은 하숙방에서 지내는 동안 각별하게 친해졌다. 1922년 청산학원 인문과에 진학한 영랑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서양 문학의 매력에 빠져든다.
특히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와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1924년 봄에 귀국하면서 영랑의 일본 유학 생활도 막을 내린다.
영랑과 용아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시문학파 결성
‘영랑’이라는 아호는 문예지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랑의 시인으로서의 작품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1906~1974)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문학> <여성> <문장> <조광(朝光)> <인문평론> <백민(白民)> <조선일보> 등에 80여 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했다. 다만, 시작품만큼은 모두 <시문학>과 <문학>에 발표된 것이었다. 실제로 영랑의 시작품은 <시문학>에 29편, <문학>에 8편이 발표됐다. 이렇게 두 잡지에 발표된 37편과 새로 추가된 16편 등 모두 53편의 시가 <영랑시집>이라는 이름으로 1935년 11월 시문학사에서 발행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는 일본 유학 시절 영랑과 친해진 용아 박용철이 있었다. 그는 1930년대에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통권 3호,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통권 4호, 1934년에는 <문학(文學)> 통권 3호 등 모두 10권의 문학잡지를 간행했다. 또한 용아는 그가 운영했던 출판사 시문학사에서 1935년에 함께 동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함으로써 영랑을 조선시단의 대표 시인으로 부각했다.
용아 자신 또한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 <문학> 및 여러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했다. 아울러 용아는 <영랑시집> 발행 이전에도 영랑의 시작품 원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가까운 문인들에게 촌평을 부탁할 정도로 영랑 시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영랑의 등단과 초기 창작에 기여한 용아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서정과 활자 미학의 극치를 담은 시집, <영랑시집>의 이모저모
용아가 편집한 영랑의 첫 시집 <영랑시집>은 가로 125mm, 세로 186mm의 크기에 전체 본문 75쪽에 걸쳐 53편의 작품을 싣고 있는 단아한 책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문학사적 의미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특히, 영랑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서정성은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당대 우리 문단을 수놓았던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 시집은 양장 제책 형식으로 제작되어 재킷이 둘러싸고 있다. 재킷 표지를 보면 지금 보아도 세련된 이미지가 앞표지 오른편 절반 부분부터 뒤표지 왼편 절반 부분까지 이어져 있고, 앞표지에는 왼편에 세로글씨로 ‘永郎詩集’이란 글자, 즉 시집 제목만이 새겨져 있다. 활자체가 아닌 손으로 쓴 글씨체의 제목이 매우 정갈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재킷을 벗기면 양장 표지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향하는 가로글씨로 금박(金箔)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미지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양장 표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나오는데, 직선으로 구성된 이미지 안에 예의 제목이 출판사를 밝히고 있는 ‘詩文學社版’이라는 글씨와 함께 세로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은박(銀箔)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 시집을 제작하는 데 있어 용아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게 한다. 속표지를 넘기면 한 면 전체가 비어 있는 가운데 키츠의 시 중에서 한 구절을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띈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이는 존 키츠의 장시(長詩) '엔디미온(Endymion)'의 첫 구절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일본 유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낭만주의 시에 심취했던 것이 이 같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리라. 이윽고 본문이 시작되는데 오늘날 타이프 서체 유사한 활자체가 한마디로 정말 예쁘다. 그리고 일반적인 시집과는 달리 이 책에는 차례가 없는 것이 독특하다. 시작품들 또한 제목 없이 일련번호로만 표기되어 있다. 그리하여 맨 처음 등장하는 작품, 즉 1번으로 표기된 작품을 보니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던, 오늘날에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알려진 시였다. 당시의 표기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관련 칼럼] 영랑과 모란과 ‘찬란한 슬픔의 봄’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렇게 시집을 넘기다 보면 이윽고 마지막 시편에 이르게 되는데, 이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53번을 달고 있는 작품은 '청명'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淸明)’이 아니라 ‘푸른 하늘’ 곧 청천(靑天)을 가리키는 ‘청명(靑冥)’인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히 출전을 찾을 길이 없으니 새로 추가된 작품인 듯하다.
이 작품은 각 5행씩 5연으로 이루어져 비교적 긴 호흡을 보여주는데,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아참/ 취여진 쳥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흐르르 버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머리속 가슴속을 저져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나가나니”로 시작하여 “왼소리의 앞소리오/ 왼빛갈의 비롯이라/ 이쳥명에 포근 췩여진 내마음/ 감각의 낯닉은 고향을 차젓노라/ 평생 못 떠날 내 집을 드럿노라”로 끝난다.
그런데 1956년 정음사에서 출판된 <영랑시선>에서는 마지막 연의 “감각의 낯닉은 고향을 차젓노라”가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낫 풀잎이라”로 바뀌었고, “평생 못 떠날 내 집을 드럿노라”는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낫 버러지로라”로 바뀌어 있다.
마지막 시편이 끝나면 그다음 장에 간기면이 나온다. 그런데 간기면 디자인 또한 범상치 않다. 그 시절에 활자만으로 이토록 간결하고도 깔끔한 체재라니. 모두 세로쓰기 한자 표기로 상하 끝 맞춤 편집인데, 먼저 ‘김윤식’이 지은 ‘영랑시집’이라는 표기를 필두로 ‘소화10년(1935년) 10월20일’에 인쇄하고 ‘소화10년 11월 5일’에 발행했다는 표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저작 겸 발행자’로 ‘경성부 적선동 169번지’의 ‘박용철’임을, 인쇄소는 ‘경성부 견지동 32번지’에 있는 ‘한성도서주식회사’이며 인쇄인은 ‘김진호’라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발행처는 발행인과 같은 주소에 있는(아마도 용아의 자택인 듯하다) ‘시문학사’이며, 우편대체구좌(진체구좌) 번호와 함께 책값은 ‘1원’, 총판매소는 인쇄소와 같은 한성도서주식회사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인지(印紙)는 붙어 있지 않다. 이로써 이 시집을 편집하고 발행한 용아의 숨긴 뜻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거니와,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각각의 시편이 지닌 작품마다의 개별적 의미에 갇히지 말고 53편의 시가 지닌 순수한 서정의 흐름을 끊김이 없이 느껴보라는 무언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발행인 용아의 기획 의도대로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는다면 평론가 이숭원의 말마따나 “마음의 정결한 내면성에서 출발하여 애잔한 슬픔과 외로움의 심정을 거쳐 간곡한 기다림과 눈물의 정한과 청명한 자연 회귀로 끝을 맺는” 편집의 절묘함과 더불어 영랑의 시 세계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나아가 앞서 펴낸 『정지용시집』의 편집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한 것도 용아의 안목일 것이다.
끝으로, 1935년에 나온 <영랑시집>에는 없지만, 1956년 판 <영랑시선>의 표지 다음에 나오는 면지를 넘기면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흔일곱 번 넘긴 영랑의 초상(肖像)이 있다. 지난 1월의 <영랑시선> 소개에서도 썼지만, 여전히 슬픈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는 영랑의 눈빛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듯하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
드디어 만났다. 지난 1월, 1956년 판 <영랑시선>을 소개할 때만 해도 내가 직접 1935년 판 <영랑시집>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948년에 초판이 발행되고 1956년에 재발행된 <영랑시선>이 영랑의 작품 중에서 골라 엮은 것이라는 점에서 <영랑시집>은 어찌 보면 김영랑 시인의 본격 시집으로는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련 칼럼) 미당 서정주가 홀딱 빠져 발문까지 써 준 시집의 1956년판
하물며 비슷한 시기 같은 출판사에서 <정지용시집>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시집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리고 이 두 시집은 2009년 국가유산청에서 근대문학 유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귀한 시집을 만난 것은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고서점을 운영하는 분의 소개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90년 세월이 무색하게 고고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었다.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1903~1950)은 1903년 1월 16일에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부농(富農)이었던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슬하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봄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고,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4세의 나이에 혼인했으나 1년여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이처럼 영랑의 생애와 문학에 있어 그의 고향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의 생애 중 7년 정도의 유학 기간과 말년 2년여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제외하면 40년 가까운 세월을 고향 강진에 머물면서 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를 썼으니 말이다.
1916년 2월경 상경하여 1년 남짓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한 영랑은 이듬해 3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진학한다.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같은 학년에 이승만(李承萬) 화백 등이 있어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봄,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여 옥고를 치렀고, 그 여파로 결국 휘문의숙을 중퇴한다.
1920년 9월 일본 동경 청산학원(靑山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면서 의미 있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때 그의 문학적 동반자이자 훗날 후원자가 되는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1904~1938)을 만났기 때문이다. 영랑과 용아는 같은 하숙방에서 지내는 동안 각별하게 친해졌다. 1922년 청산학원 인문과에 진학한 영랑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서양 문학의 매력에 빠져든다.
특히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와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1924년 봄에 귀국하면서 영랑의 일본 유학 생활도 막을 내린다.
영랑과 용아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시문학파 결성
‘영랑’이라는 아호는 문예지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랑의 시인으로서의 작품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1906~1974)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문학> <여성> <문장> <조광(朝光)> <인문평론> <백민(白民)> <조선일보> 등에 80여 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했다. 다만, 시작품만큼은 모두 <시문학>과 <문학>에 발표된 것이었다. 실제로 영랑의 시작품은 <시문학>에 29편, <문학>에 8편이 발표됐다. 이렇게 두 잡지에 발표된 37편과 새로 추가된 16편 등 모두 53편의 시가 <영랑시집>이라는 이름으로 1935년 11월 시문학사에서 발행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는 일본 유학 시절 영랑과 친해진 용아 박용철이 있었다. 그는 1930년대에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통권 3호,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통권 4호, 1934년에는 <문학(文學)> 통권 3호 등 모두 10권의 문학잡지를 간행했다. 또한 용아는 그가 운영했던 출판사 시문학사에서 1935년에 함께 동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함으로써 영랑을 조선시단의 대표 시인으로 부각했다.
용아 자신 또한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 <문학> 및 여러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했다. 아울러 용아는 <영랑시집> 발행 이전에도 영랑의 시작품 원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가까운 문인들에게 촌평을 부탁할 정도로 영랑 시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영랑의 등단과 초기 창작에 기여한 용아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서정과 활자 미학의 극치를 담은 시집, <영랑시집>의 이모저모
용아가 편집한 영랑의 첫 시집 <영랑시집>은 가로 125mm, 세로 186mm의 크기에 전체 본문 75쪽에 걸쳐 53편의 작품을 싣고 있는 단아한 책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문학사적 의미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특히, 영랑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보여주는 서정성은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당대 우리 문단을 수놓았던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 시집은 양장 제책 형식으로 제작되어 재킷이 둘러싸고 있다. 재킷 표지를 보면 지금 보아도 세련된 이미지가 앞표지 오른편 절반 부분부터 뒤표지 왼편 절반 부분까지 이어져 있고, 앞표지에는 왼편에 세로글씨로 ‘永郎詩集’이란 글자, 즉 시집 제목만이 새겨져 있다. 활자체가 아닌 손으로 쓴 글씨체의 제목이 매우 정갈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재킷을 벗기면 양장 표지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향하는 가로글씨로 금박(金箔)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미지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양장 표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나오는데, 직선으로 구성된 이미지 안에 예의 제목이 출판사를 밝히고 있는 ‘詩文學社版’이라는 글씨와 함께 세로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은박(銀箔)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 시집을 제작하는 데 있어 용아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게 한다. 속표지를 넘기면 한 면 전체가 비어 있는 가운데 키츠의 시 중에서 한 구절을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띈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이는 존 키츠의 장시(長詩) '엔디미온(Endymion)'의 첫 구절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일본 유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낭만주의 시에 심취했던 것이 이 같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리라. 이윽고 본문이 시작되는데 오늘날 타이프 서체 유사한 활자체가 한마디로 정말 예쁘다. 그리고 일반적인 시집과는 달리 이 책에는 차례가 없는 것이 독특하다. 시작품들 또한 제목 없이 일련번호로만 표기되어 있다. 그리하여 맨 처음 등장하는 작품, 즉 1번으로 표기된 작품을 보니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던, 오늘날에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알려진 시였다. 당시의 표기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그다음으로 나오는 2번 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로, 1930년 4월 <시문학> 제2호에 맨 처음 발표될 때는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라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영랑의 시 가운데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많이 낭송되고 있는 작품은 45번에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원래 1934년 4월 <문학> 제3호에 처음 발표되었던 것인데, 이 시집에 실려 있는 것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 날빗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피ㅅ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45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
떠러져누은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쳐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잇슬테요 찬란한슬픔의 봄을
▶▶▶[관련 칼럼] 영랑과 모란과 ‘찬란한 슬픔의 봄’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렇게 시집을 넘기다 보면 이윽고 마지막 시편에 이르게 되는데, 이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53번을 달고 있는 작품은 '청명'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淸明)’이 아니라 ‘푸른 하늘’ 곧 청천(靑天)을 가리키는 ‘청명(靑冥)’인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히 출전을 찾을 길이 없으니 새로 추가된 작품인 듯하다.
이 작품은 각 5행씩 5연으로 이루어져 비교적 긴 호흡을 보여주는데,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아참/ 취여진 쳥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흐르르 버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머리속 가슴속을 저져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나가나니”로 시작하여 “왼소리의 앞소리오/ 왼빛갈의 비롯이라/ 이쳥명에 포근 췩여진 내마음/ 감각의 낯닉은 고향을 차젓노라/ 평생 못 떠날 내 집을 드럿노라”로 끝난다.
그런데 1956년 정음사에서 출판된 <영랑시선>에서는 마지막 연의 “감각의 낯닉은 고향을 차젓노라”가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낫 풀잎이라”로 바뀌었고, “평생 못 떠날 내 집을 드럿노라”는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낫 버러지로라”로 바뀌어 있다.
마지막 시편이 끝나면 그다음 장에 간기면이 나온다. 그런데 간기면 디자인 또한 범상치 않다. 그 시절에 활자만으로 이토록 간결하고도 깔끔한 체재라니. 모두 세로쓰기 한자 표기로 상하 끝 맞춤 편집인데, 먼저 ‘김윤식’이 지은 ‘영랑시집’이라는 표기를 필두로 ‘소화10년(1935년) 10월20일’에 인쇄하고 ‘소화10년 11월 5일’에 발행했다는 표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저작 겸 발행자’로 ‘경성부 적선동 169번지’의 ‘박용철’임을, 인쇄소는 ‘경성부 견지동 32번지’에 있는 ‘한성도서주식회사’이며 인쇄인은 ‘김진호’라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발행처는 발행인과 같은 주소에 있는(아마도 용아의 자택인 듯하다) ‘시문학사’이며, 우편대체구좌(진체구좌) 번호와 함께 책값은 ‘1원’, 총판매소는 인쇄소와 같은 한성도서주식회사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인지(印紙)는 붙어 있지 않다. 이로써 이 시집을 편집하고 발행한 용아의 숨긴 뜻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거니와,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각각의 시편이 지닌 작품마다의 개별적 의미에 갇히지 말고 53편의 시가 지닌 순수한 서정의 흐름을 끊김이 없이 느껴보라는 무언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발행인 용아의 기획 의도대로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는다면 평론가 이숭원의 말마따나 “마음의 정결한 내면성에서 출발하여 애잔한 슬픔과 외로움의 심정을 거쳐 간곡한 기다림과 눈물의 정한과 청명한 자연 회귀로 끝을 맺는” 편집의 절묘함과 더불어 영랑의 시 세계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나아가 앞서 펴낸 『정지용시집』의 편집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한 것도 용아의 안목일 것이다.
끝으로, 1935년에 나온 <영랑시집>에는 없지만, 1956년 판 <영랑시선>의 표지 다음에 나오는 면지를 넘기면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흔일곱 번 넘긴 영랑의 초상(肖像)이 있다. 지난 1월의 <영랑시선> 소개에서도 썼지만, 여전히 슬픈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는 영랑의 눈빛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듯하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