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부터 보이는 오귀스트 에르뱅의 '커피 한 잔이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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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용재의 맛있는 미술관
오귀스트 에르뱅의 <커피 한 잔이 있는 정물>
핵심은 '커피'가 아니다?
오귀스트 에르뱅의 <커피 한 잔이 있는 정물>
핵심은 '커피'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계속 유화만 소개하고 있다. 아주 의도적인 건 아니다. 사실 소개할 만한 음식과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시각 정보가 차고 넘쳐나는 시대다 보니 때가 되면 맛있는 그림이 내 앞에 뚝 떨어진다. 그게 지금까지는 공교롭게도 유화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음식에서 질감(texture)은 매우 중요한데 유화에게 유리한 구석이 있다. 기름을 매체로 삼은 물감은 2차원을 넘어 3차원에 가까운 표현이 가능할 정도의 농도와 질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오늘도 유화를 소개한다는 이야기를 좀 길게 했다.
오귀스트 에르뱅(1882~1960)은 파리의 화단에서 활약했던 현대 화가이다. 삼각형, 원, 장방형 등의 기본적인 형태와 원색을 조합한 기하학적 추상화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피카소가 그랬듯 에르뱅도 하루아침에 대뜸 추상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는 시기를 거쳐 갔는데, 이때도 큐비즘을 접목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 <커피 한 잔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à la tasse de café)>(1926)이 있다. 제목에 커피가 있으니 ‘커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군?’이라고 넘겨짚는다면 틀렸다. 사실 이 작품에서 커피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작은 잔에 큰 숟가락이 담겨 있기에 제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커피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누가 저렇게 큰 숟가락을 잔에 담가 놓은 채 커피를 마신다는 말인가? 그나마 선해를 한다면 시각적 균형을 위해 숟가락을 저렇게 설정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가운데, 나머지 정물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다. 작품을 보면 바로 감이 잡히겠지만 빵 두 덩이다. 일단 부피만으로도 커피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지만, 사실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진짜 요인은 각 빵 표면의 분절 및 재질감이다.
두 빵 모두 특정한 질감을 지닌 표면이 분절, 즉 작은 덩어리로 표현되어 시각적인 주도권을 잡는다는 말인데, 서로 다른 기술을 적용해 이룬 것이라 제빵의 측면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왼쪽의 빵부터 살펴보자면 밀가루, 효모(혹은 발효종), 소금, 물의 기본 재료만으로 만든 반죽을 써 만든 반죽을 반구형으로 빚어 구운 것이다.
두 번의 발효를 거친 빵 반죽을 오븐에 넣으면 일단 수분이 증발하며 부풀어 오른다. 이때 증기가 반죽에서 빠져나올 여지를 잘 만들어 주지 않으면 반죽은 불균일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린다. 이를 막고자 오븐에 넣기 직전 빵 반죽에 면도칼 등으로 칼집을 넣어준다. 덕분에 반죽은 칼집을 중심으로 균일하게 부풀어 올라 예쁘게 구워진다.
작품 왼쪽의 빵이 바로 그런 결과물이다. 윗면, 즉 작품에서 보이는 정면의 갈색 부분이 바로 칼집의 흔적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디가는 칼집이 빵이 팽창하며 벌어져 흡사 거북이 등껍질 같은 표면을 자아낸다. 제빵사들은 이 칼집을 활용해 빵에 자신만의 문양을 불어 넣기도 한다. 한편 오른쪽의 빵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볼록볼록한 작은 덩어리들의 분절을 불어넣었다. 유대인의 전통 빵인 찰라(Challah)인데,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1001가지’로 꼽힐 정도로 유명세를 누린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헤매던 엿새째에 먹을 수 있었던 만나에서 비롯된 빵이다. 계란을 푸짐하게 써 부드럽고 촉촉해 브리오슈와 비슷하다.
찰라는 1차 발효를 마친 반죽을 여러 쪽으로 나눠 길게 모양을 잡은 뒤 이를 한데 모아 땋아서 전통적인 모양을 빚는다. 그래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작은 덩어리들이 오밀조밀 모여 귀여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두 빵 모두 이러한 표면의 특징이 유화라는 매체 덕분에 아주 잘 표현되었다. 이렇게 제목과는 좀 달리 커피보다 두 빵이 핵심인 정물이 완성되었다. 어떤 빵이 명목상 주인공인 커피와 더 잘 어울릴까? 취향을 따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맛의 원리만 놓고 따지자면 찰라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계란과 버터를 듬뿍 써 풍성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커피의 쓴맛과 신맛 등이 균형을 잘 잡아 주기 때문이다. 찰라는 계란물에 적셔 프렌치토스트를 만들면 더 맛있어진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음식에서 질감(texture)은 매우 중요한데 유화에게 유리한 구석이 있다. 기름을 매체로 삼은 물감은 2차원을 넘어 3차원에 가까운 표현이 가능할 정도의 농도와 질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오늘도 유화를 소개한다는 이야기를 좀 길게 했다.
오귀스트 에르뱅(1882~1960)은 파리의 화단에서 활약했던 현대 화가이다. 삼각형, 원, 장방형 등의 기본적인 형태와 원색을 조합한 기하학적 추상화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피카소가 그랬듯 에르뱅도 하루아침에 대뜸 추상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는 시기를 거쳐 갔는데, 이때도 큐비즘을 접목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 <커피 한 잔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à la tasse de café)>(1926)이 있다. 제목에 커피가 있으니 ‘커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군?’이라고 넘겨짚는다면 틀렸다. 사실 이 작품에서 커피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작은 잔에 큰 숟가락이 담겨 있기에 제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커피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누가 저렇게 큰 숟가락을 잔에 담가 놓은 채 커피를 마신다는 말인가? 그나마 선해를 한다면 시각적 균형을 위해 숟가락을 저렇게 설정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가운데, 나머지 정물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다. 작품을 보면 바로 감이 잡히겠지만 빵 두 덩이다. 일단 부피만으로도 커피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지만, 사실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진짜 요인은 각 빵 표면의 분절 및 재질감이다.
두 빵 모두 특정한 질감을 지닌 표면이 분절, 즉 작은 덩어리로 표현되어 시각적인 주도권을 잡는다는 말인데, 서로 다른 기술을 적용해 이룬 것이라 제빵의 측면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왼쪽의 빵부터 살펴보자면 밀가루, 효모(혹은 발효종), 소금, 물의 기본 재료만으로 만든 반죽을 써 만든 반죽을 반구형으로 빚어 구운 것이다.
두 번의 발효를 거친 빵 반죽을 오븐에 넣으면 일단 수분이 증발하며 부풀어 오른다. 이때 증기가 반죽에서 빠져나올 여지를 잘 만들어 주지 않으면 반죽은 불균일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린다. 이를 막고자 오븐에 넣기 직전 빵 반죽에 면도칼 등으로 칼집을 넣어준다. 덕분에 반죽은 칼집을 중심으로 균일하게 부풀어 올라 예쁘게 구워진다.
작품 왼쪽의 빵이 바로 그런 결과물이다. 윗면, 즉 작품에서 보이는 정면의 갈색 부분이 바로 칼집의 흔적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디가는 칼집이 빵이 팽창하며 벌어져 흡사 거북이 등껍질 같은 표면을 자아낸다. 제빵사들은 이 칼집을 활용해 빵에 자신만의 문양을 불어 넣기도 한다. 한편 오른쪽의 빵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볼록볼록한 작은 덩어리들의 분절을 불어넣었다. 유대인의 전통 빵인 찰라(Challah)인데,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1001가지’로 꼽힐 정도로 유명세를 누린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헤매던 엿새째에 먹을 수 있었던 만나에서 비롯된 빵이다. 계란을 푸짐하게 써 부드럽고 촉촉해 브리오슈와 비슷하다.
찰라는 1차 발효를 마친 반죽을 여러 쪽으로 나눠 길게 모양을 잡은 뒤 이를 한데 모아 땋아서 전통적인 모양을 빚는다. 그래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작은 덩어리들이 오밀조밀 모여 귀여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두 빵 모두 이러한 표면의 특징이 유화라는 매체 덕분에 아주 잘 표현되었다. 이렇게 제목과는 좀 달리 커피보다 두 빵이 핵심인 정물이 완성되었다. 어떤 빵이 명목상 주인공인 커피와 더 잘 어울릴까? 취향을 따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맛의 원리만 놓고 따지자면 찰라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계란과 버터를 듬뿍 써 풍성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커피의 쓴맛과 신맛 등이 균형을 잘 잡아 주기 때문이다. 찰라는 계란물에 적셔 프렌치토스트를 만들면 더 맛있어진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