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온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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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하는 엥거스의 노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 개암나무숲으로 갔네.
머릿속이 불타올랐기에,
나뭇가지 꺾어 껍질 벗기고,
낚싯바늘에 딸기 꿰고 줄에 매달아,
흰 나방이 날갯짓하고,
나방 같은 별들이 반짝일 때,
냇물에 그 열매 드리워
자그마한 은빛 송어 한 마리 낚았네.
돌아와 그걸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불을 피우러 갔지.
뭔가 마룻바닥에서 바스락거렸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네.
송어는 머리에 사과꽃을 단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곤 뛰어나가
눈부신 허공 속으로 사라졌네.
골짜기와 언덕을 헤매느라
나 이제 나이 들었지만,
그녀가 간 곳을 찾아내어
입 맞추고 손 잡으리,
그리고 알록달록 긴 풀숲을 거닐면서
시간과 세월이 다할 때까지 따리라,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들을.
--------------------------------- 오늘처럼 그날은 8월 16일이었습니다. 59년 전인 1965년, 한여름이었지요. 중년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미국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한적한 마을을 찾았습니다. 지붕이 덮인 다리 7개 중 마지막 다리를 찾다가 길을 잃은 그는 어느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묻습니다.
마침 집에 혼자 있던 여인은 농가의 안주인 프란체스카. 남편과 두 아이가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의 박람회에 참가하러 떠난 뒤 현관 그네에 앉아 한가롭게 아이스티를 마시던 중이었지요. 그녀는 다리의 위치를 한참 설명하다가 직접 길 안내에 나섭니다.
그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고 집 주위를 산책하던 중 로버트가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라는 시 구절을 읊자 그녀는 “예이츠! ‘유랑하는 엥거스의 노래’”라고 말하지요. 로버트는 예이츠 시의 특성을 들려주며 자신이 예이츠와 같은 아일랜드 혈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밤 그녀는 예이츠의 시를 다시 읽고 조심스레 쪽지를 씁니다. “흰 나방이 날갯짓할 때 또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일 마치고 오늘 밤에 오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흰 나방의 날갯짓’ 구절을 빌려 저녁 먹으러 오라고 초대하는 문구였습니다.
잠 못 이루던 그녀가 새벽에 차를 몰고 달려가 다리에 붙여둔 그 쪽지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면이 아주 생생합니다. 이후 나흘간의 짧은 사랑과 평생의 그리움이 이어지지요.
안타까운 이별 뒤, 로버트는 이 쪽지를 늘 간직하고 있다가 <4일 동안>이라는 그의 사진집 속에 끼워뒀습니다. 그가 죽은 뒤 평생 아끼던 카메라와 함께 상자에 담겨 프란체스카에게 배달된 유품 속의 빛바랜 쪽지….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이들의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의 명연기가 아직 눈에 선합니다.
나방은 나비와 달리 어두워져야 날지요. 예의 바른 이방인 남자와 정숙한 시골 여인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어스름 저녁 ‘나방의 날갯짓’처럼 가슴속의 열정을 흔드는 과정이 예이츠의 시에 묘사된 정경과 절묘하게 겹칩니다. 이 시의 제목에 나오는 엥거스(Aengus)는 아일랜드 신화 속 사랑과 젊음의 신입니다. 엥거스는 꿈속에서 만난 처녀에게 홀딱 반합니다. 그는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온 아일랜드를 찾아 헤맨 끝에 어느 호수에서 그녀를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마법에 걸린 150명의 처녀가 은빛 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1년에 한 번, 축제의 둘째 날인 11월 1일에 모두 백조로 변신합니다. 엥거스는 그 많은 백조 중에서 그녀를 알아내야 결혼할 수 있지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그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자기도 백조로 변해 그녀와 사랑을 이루게 됐습니다. 이 백조 부부가 날아가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듣는 이들은 사흘 밤낮 동안 잠에 빠졌다고 합니다.
8세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엥거스의 꿈’ 전설이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개울에서 잡은 ‘은빛 송어’가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로 변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사라졌다고 했지요. 여기에서 ‘은빛 송어’는 ‘은빛 사슬’에 묶인 처녀와 그들이 변한 ‘은빛 백조’,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는 꿈속에 나타났다 사라진 처녀의 비유라고 합니다.
마지막 부분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를 따겠다는 문구는 수많은 책과 음악, 영화, 뮤지컬, 드라마의 제목이나 내용에 폭넓게 인용됐지요. 예이츠도 이 시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는 그가 평생 사랑했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한 연인 모드 곤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 한 편이 주는 감흥과 감동은 이렇게 끝이 없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도 수많은 사연이 엮여 있지요. 생각하면 날마다 ‘기적 같은 하루’가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 곁에는 또 어떤 운명의 드라마가 기적처럼 펼쳐질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 개암나무숲으로 갔네.
머릿속이 불타올랐기에,
나뭇가지 꺾어 껍질 벗기고,
낚싯바늘에 딸기 꿰고 줄에 매달아,
흰 나방이 날갯짓하고,
나방 같은 별들이 반짝일 때,
냇물에 그 열매 드리워
자그마한 은빛 송어 한 마리 낚았네.
돌아와 그걸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불을 피우러 갔지.
뭔가 마룻바닥에서 바스락거렸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네.
송어는 머리에 사과꽃을 단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곤 뛰어나가
눈부신 허공 속으로 사라졌네.
골짜기와 언덕을 헤매느라
나 이제 나이 들었지만,
그녀가 간 곳을 찾아내어
입 맞추고 손 잡으리,
그리고 알록달록 긴 풀숲을 거닐면서
시간과 세월이 다할 때까지 따리라,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들을.
--------------------------------- 오늘처럼 그날은 8월 16일이었습니다. 59년 전인 1965년, 한여름이었지요. 중년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미국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한적한 마을을 찾았습니다. 지붕이 덮인 다리 7개 중 마지막 다리를 찾다가 길을 잃은 그는 어느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묻습니다.
마침 집에 혼자 있던 여인은 농가의 안주인 프란체스카. 남편과 두 아이가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의 박람회에 참가하러 떠난 뒤 현관 그네에 앉아 한가롭게 아이스티를 마시던 중이었지요. 그녀는 다리의 위치를 한참 설명하다가 직접 길 안내에 나섭니다.
그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고 집 주위를 산책하던 중 로버트가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라는 시 구절을 읊자 그녀는 “예이츠! ‘유랑하는 엥거스의 노래’”라고 말하지요. 로버트는 예이츠 시의 특성을 들려주며 자신이 예이츠와 같은 아일랜드 혈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밤 그녀는 예이츠의 시를 다시 읽고 조심스레 쪽지를 씁니다. “흰 나방이 날갯짓할 때 또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일 마치고 오늘 밤에 오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흰 나방의 날갯짓’ 구절을 빌려 저녁 먹으러 오라고 초대하는 문구였습니다.
잠 못 이루던 그녀가 새벽에 차를 몰고 달려가 다리에 붙여둔 그 쪽지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면이 아주 생생합니다. 이후 나흘간의 짧은 사랑과 평생의 그리움이 이어지지요.
안타까운 이별 뒤, 로버트는 이 쪽지를 늘 간직하고 있다가 <4일 동안>이라는 그의 사진집 속에 끼워뒀습니다. 그가 죽은 뒤 평생 아끼던 카메라와 함께 상자에 담겨 프란체스카에게 배달된 유품 속의 빛바랜 쪽지….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이들의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의 명연기가 아직 눈에 선합니다.
나방은 나비와 달리 어두워져야 날지요. 예의 바른 이방인 남자와 정숙한 시골 여인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어스름 저녁 ‘나방의 날갯짓’처럼 가슴속의 열정을 흔드는 과정이 예이츠의 시에 묘사된 정경과 절묘하게 겹칩니다. 이 시의 제목에 나오는 엥거스(Aengus)는 아일랜드 신화 속 사랑과 젊음의 신입니다. 엥거스는 꿈속에서 만난 처녀에게 홀딱 반합니다. 그는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온 아일랜드를 찾아 헤맨 끝에 어느 호수에서 그녀를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마법에 걸린 150명의 처녀가 은빛 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1년에 한 번, 축제의 둘째 날인 11월 1일에 모두 백조로 변신합니다. 엥거스는 그 많은 백조 중에서 그녀를 알아내야 결혼할 수 있지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그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자기도 백조로 변해 그녀와 사랑을 이루게 됐습니다. 이 백조 부부가 날아가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듣는 이들은 사흘 밤낮 동안 잠에 빠졌다고 합니다.
8세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엥거스의 꿈’ 전설이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개울에서 잡은 ‘은빛 송어’가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로 변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사라졌다고 했지요. 여기에서 ‘은빛 송어’는 ‘은빛 사슬’에 묶인 처녀와 그들이 변한 ‘은빛 백조’,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는 꿈속에 나타났다 사라진 처녀의 비유라고 합니다.
마지막 부분 ‘달의 은빛 사과,/ 해의 금빛 사과’를 따겠다는 문구는 수많은 책과 음악, 영화, 뮤지컬, 드라마의 제목이나 내용에 폭넓게 인용됐지요. 예이츠도 이 시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는 그가 평생 사랑했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한 연인 모드 곤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 한 편이 주는 감흥과 감동은 이렇게 끝이 없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도 수많은 사연이 엮여 있지요. 생각하면 날마다 ‘기적 같은 하루’가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 곁에는 또 어떤 운명의 드라마가 기적처럼 펼쳐질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