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자우너 "췌장암으로 떠난 엄마…잔소리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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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겸 작가로 서울국제도서전 참가…북토크 등 진행
병원 한 번 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엄마였다.
웬만한 병은 집에서 해결할 정도로 '억척'이었다.
그러던 엄마가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김치를 먹지 못하는 사람과는 결혼도 하지 말라던 그녀는 병이 악화하자 그 좋아하던 김치마저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됐다.
나중에는 홀로 움직일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열심히 엄마를 내가 돌보면 반드시 회복할 거라고. 그렇게 4개월 동안 부정했지만, 결국 그렇게 됐죠."
미셸 자우너(35)는 27일 서울 강남지역의 한 호텔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어머니의 죽음을 이렇게 회고했다.
자우너는 1인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2021년 발매한 음반 '주빌리'는 그해 빌보드 상반기 최고의 음반 50에 선정됐다.
그래미 어워즈 신인상인 '베스트 뉴 아티스트'와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H 마트에서 울다'(원제: Crying in H mart)는 미국에서 출간돼 격찬받았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2022년 나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은 어머니의 죽음 과정과 밴드 탄생 과정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따뜻했던 기억, 청소년 시절의 방황, 엄마와의 갈등, 아버지와의 서먹함, 정신적 붕괴와 음악에 대한 꿈 등을 엮었다.
그는 책을 쓰는 데에만 6년이 걸렸다고 했다.
자우너는 이날 '청춘의 부산물'인 이 책을 들고,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북토크를 진행한다.
"책 쓰는 건 정말 어려워요.
글의 구조를 생각해야 하고, 전체적으로 계산도 해야 합니다.
지적인 과정인데, 글을 쓸 때마다 제가 참 멍청하다고 느낍니다.
(웃음) 반면 음악은 좀 더 자연스러워요.
즉흥적이고, 즉자적이죠. 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선 음악이 더 익숙해요.
" 음악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갈등의 뿌리이기도 했다.
엄마는 자우너가 변호사가 되길 바랐다.
"말싸움을 잘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반면에 그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반은 백인으로, 반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혼란 속에서 음악은 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영혼의 동반자인 음악에 헌신하고 싶었다.
"뮤지션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고, 엄마는 그걸 너무도 잘 알았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마 돌이켜보면, 그때 저에 대해 걱정했던 것 같아요.
"
엄마의 잔소리와 자우너의 반항이 이어지면서 모녀의 관계는 한때 극단으로 치달았다.
'머플러는 왜 안 했니' '크림을 바르고 나가렴' '얼굴에 팩을 해라' 등 자잘한 잔소리가 대양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미국 서부에 살던 그가 동부에 있는 대학에만 지원하고, 그곳에서 쭉 살았던 이유는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밴드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동부 생활도 익숙해졌을 무렵에 엄마의 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장 달려갔고, 최선을 다해 돌봤지만, 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암이 너무 늦게 발견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어렸을 때 그토록 듣기 싫던 잔소리가 지금은 너무도 그립다고 한다.
"큰이모가 잔소리할 때 너무 행복하고, 편안해요.
그 잔소리는 엄마를 떠올리게 해요.
엄마처럼 솔직하게 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제 단점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씀하시곤 하셨죠.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고요.
남편도 가끔 잔소리하지만, 제 기분을 파악해가며 합니다.
엄마처럼 솔직히는 못 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떠나보내고 나니, 엄마의 잔소리가 매우 그립습니다.
" 엄마의 자취를 느껴보고자 그는 현재 엄마의 고향인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작년 12월 말에 들어와 '1년살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엄마는 어린 시절 '너는 한국에서 1년만 살면 충분히 한국말을 마스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뒤늦게 그 말을 실천 중이다.
반년은 연세대에서, 또 다른 반년은 서강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돼 있다.
엄마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기에 "1년 이상 걸릴 것 같다"고 했다.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생활에 대한 책도 쓸 계획이에요.
한국에서 꼭 살고 싶었어요.
그간 너무 달려와서 휴식도 필요했고요.
좀 더 느린 삶을 살고 싶었어요.
느리게 살고 싶어서 온 곳이 '빨리빨리'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회 중 하나인 한국이라니……. 삶이란 참 아이러니합니다.
(웃음)"
/연합뉴스
웬만한 병은 집에서 해결할 정도로 '억척'이었다.
그러던 엄마가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김치를 먹지 못하는 사람과는 결혼도 하지 말라던 그녀는 병이 악화하자 그 좋아하던 김치마저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됐다.
나중에는 홀로 움직일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열심히 엄마를 내가 돌보면 반드시 회복할 거라고. 그렇게 4개월 동안 부정했지만, 결국 그렇게 됐죠."
미셸 자우너(35)는 27일 서울 강남지역의 한 호텔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어머니의 죽음을 이렇게 회고했다.
자우너는 1인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2021년 발매한 음반 '주빌리'는 그해 빌보드 상반기 최고의 음반 50에 선정됐다.
그래미 어워즈 신인상인 '베스트 뉴 아티스트'와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H 마트에서 울다'(원제: Crying in H mart)는 미국에서 출간돼 격찬받았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2022년 나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은 어머니의 죽음 과정과 밴드 탄생 과정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따뜻했던 기억, 청소년 시절의 방황, 엄마와의 갈등, 아버지와의 서먹함, 정신적 붕괴와 음악에 대한 꿈 등을 엮었다.
그는 책을 쓰는 데에만 6년이 걸렸다고 했다.
자우너는 이날 '청춘의 부산물'인 이 책을 들고,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북토크를 진행한다.
"책 쓰는 건 정말 어려워요.
글의 구조를 생각해야 하고, 전체적으로 계산도 해야 합니다.
지적인 과정인데, 글을 쓸 때마다 제가 참 멍청하다고 느낍니다.
(웃음) 반면 음악은 좀 더 자연스러워요.
즉흥적이고, 즉자적이죠. 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선 음악이 더 익숙해요.
" 음악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갈등의 뿌리이기도 했다.
엄마는 자우너가 변호사가 되길 바랐다.
"말싸움을 잘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반면에 그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반은 백인으로, 반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혼란 속에서 음악은 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영혼의 동반자인 음악에 헌신하고 싶었다.
"뮤지션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고, 엄마는 그걸 너무도 잘 알았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마 돌이켜보면, 그때 저에 대해 걱정했던 것 같아요.
"
엄마의 잔소리와 자우너의 반항이 이어지면서 모녀의 관계는 한때 극단으로 치달았다.
'머플러는 왜 안 했니' '크림을 바르고 나가렴' '얼굴에 팩을 해라' 등 자잘한 잔소리가 대양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미국 서부에 살던 그가 동부에 있는 대학에만 지원하고, 그곳에서 쭉 살았던 이유는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밴드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동부 생활도 익숙해졌을 무렵에 엄마의 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장 달려갔고, 최선을 다해 돌봤지만, 집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암이 너무 늦게 발견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어렸을 때 그토록 듣기 싫던 잔소리가 지금은 너무도 그립다고 한다.
"큰이모가 잔소리할 때 너무 행복하고, 편안해요.
그 잔소리는 엄마를 떠올리게 해요.
엄마처럼 솔직하게 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제 단점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씀하시곤 하셨죠.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고요.
남편도 가끔 잔소리하지만, 제 기분을 파악해가며 합니다.
엄마처럼 솔직히는 못 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떠나보내고 나니, 엄마의 잔소리가 매우 그립습니다.
" 엄마의 자취를 느껴보고자 그는 현재 엄마의 고향인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작년 12월 말에 들어와 '1년살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엄마는 어린 시절 '너는 한국에서 1년만 살면 충분히 한국말을 마스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뒤늦게 그 말을 실천 중이다.
반년은 연세대에서, 또 다른 반년은 서강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돼 있다.
엄마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기에 "1년 이상 걸릴 것 같다"고 했다.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생활에 대한 책도 쓸 계획이에요.
한국에서 꼭 살고 싶었어요.
그간 너무 달려와서 휴식도 필요했고요.
좀 더 느린 삶을 살고 싶었어요.
느리게 살고 싶어서 온 곳이 '빨리빨리'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회 중 하나인 한국이라니……. 삶이란 참 아이러니합니다.
(웃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