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고립되는 의사들
‘히포크라테스의 통곡’이라는 제목을 단 대자보가 분당서울대병원 곳곳에 내걸렸다.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이 17일부터 집단 휴진을 결의한 데 대해 이 병원 노조가 내건 대자보다. 노조는 “휴진으로 고통받는 이는 예약된 환자와 동료뿐”이라며 “의사제국 총독부의 불법 파업 결의를 규탄한다”는 내용을 대자보에 담았다. 오죽하면 한솥밥 먹는 사람들을 ‘의사제국’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할까.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등 5개 환자단체가 속한 중증질환연합회는 의사들의 행태가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다고 규탄했다. 협회는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국민을 혼란에 빠트리고 무정부주의를 주장한 의사 집단을 더는 용서해서는 안 된다”며 대규모 고소·고발을 예고했다.

당초 정부를 상대로 의대 증원 반대 투쟁에 나섰던 의사 집단은 사실상 법원 판단으로 내년도 증원이 확정되자 이제는 ‘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의 가시적 조치’라는 모호한 구호를 걸고 집단 휴진에 나서는 모습이다. 분명한 목표도, 명분도 없는 분풀이식 투쟁이다. 그 바람에 환자, 병원, 노조뿐만 아니라 초기 정부의 일방통행을 비판하던 시민단체들도 모두 등을 돌리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불법 진료 거부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즉각 철회돼야 한다. (정부는) 불법 행동 가담자에게 선처 없이 엄정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시작된 의료 파행이 오늘로 115일째를 맞는다. 일반 국민과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들도 이번 사태가 이렇게까지 장기화할 줄 몰랐을 것이다. 정부가 2000명 증원에서 한발 물러섰을 때, 내년도 의대 정원이 확정됐을 때 해법을 찾아갈 수 있으려니 했지만 오히려 사태는 악화일로다. 고립무원 탓인지 의사들은 더 과격해지고 있다. “정부, 국민은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태세다. 하지만 이제 이길 수도 없지만, 승리한다 한들 국민의 실망과 불신은 되돌릴 길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기득권 집단의 몽니만 부각될 뿐이다. 의사들은 지고도 이길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날려 보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