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토성서 백제 물 저장시설 확인…옻칠 갑옷 조각도 나와(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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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갑옷 조각, 공주 공산성·부여 관북리 유적 이어 세 번째 확인
당대 문서 보관법 파악할 '봉축' 흔적도…"국내 유적서는 처음 발견"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기와가 대거 출토됐던 전북 익산토성 일대에서 옻칠한 갑옷의 흔적이 확인됐다.
공주 공산성, 부여 관북리 유적에 이은 세 번째 사례라 관심이 쏠린다.
국가유산청은 익산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함께 발굴 조사 중인 익산토성에서 칠피 갑옷 조각이 출토됐다고 30일 밝혔다.
칠피 갑옷은 옻칠한 가죽을 이어 붙여 만든 갑옷을 뜻한다.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에 원형 구멍이 뚫려 있는 형태의 조각은 6점 확인됐다.
이들 조각은 익산토성의 남쪽에 있는 집수시설 안에서 발견됐다.
이영일 국가유산청 연구관은 "전투를 위해 착용했던 갑옷 조각이 떨어져 집수시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물을 모아두기 위해 만든 집수시설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집수시설은 직경이 동서 9.5m, 남북 7.8m, 최대 깊이는 4.5m에 이르는 거대한 형태다.
1981년 남쪽 성벽을 조사할 당시에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연구관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이남 지역에서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집수시설이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집수시설은 일부가 무너져 내렸으나 하단부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확인됐다.
바닥은 자연 암반을 인위적으로 깎고 다듬은 형태이며, 북동쪽 부분은 물이 가운데로 유입될 수 있도록 암반을 가공한 형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남쪽에는 돌을 이용해 최대 높이가 80㎝에 이르는 단을 쌓았다.
집수시설은 백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한 차례 이상 보수 공사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시설 안에서는 칠피 갑옷 조각 외에도 백제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와 토기 조각 여러 점이 함께 출토됐다.
문서를 분류할 때 쓴 것으로 보이는 목재 막대기도 발견됐다.
직경 2.3㎝ 크기의 원통형 막대기에는 '정사(丁巳) 금재식'(今在食·현재 남아있는 식량이라는 뜻)이라고 적힌 글이 있어 정사년에 성안의 식량을 기록한 문서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문서를 분류할 때 쓴 흔적으로 확인될 경우, 백제 시기 문서 보관 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자 익산토성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문에 참여한 이병호 동국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의 한 종류인 '봉축'(棒軸)이 국내 유적에서 발견된 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봉축은 문서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쓴 일종의 색인을 일컫는다.
기다란 막대 끝에 문서 이름을 표기해 두루마리 모양의 종이를 펴지 않고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에 남은 '정사년'은 597년 혹은 657년으로 추정되며, 익산토성을 언제 사용했는지 밝힐 근거가 될 전망이다.
함께 발굴된 수막새 등의 제작 시기를 고려할 때 657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분석도 나온다.
이 교수는 "성곽이라는 방어 시설에서 반드시 필요한 식량 저장과 관련한 기록"이라며 "(백제가 멸망한) 660년 전후라는 역사적 상황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조사단은 조사 결과에 대해 "자연 지형을 이용한 유수 관리 방법과 이를 활용한 백제인의 토목 기술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과 익산시,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이날 오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2-2번지 일대 발굴 현장에서 이런 내용을 포함해 그간의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익산토성은 해발 125m의 오금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 유적이다.
일명 '오금산성'으로도 불리며 2017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해 백제의 왕이 기거하는 궁궐에서 썼던 기와를 뜻하는 수부(首府)명 기와 등 백제 기와가 다량 출토된 바 있다.
학계에서는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왕궁리 유적과 연계된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대 문서 보관법 파악할 '봉축' 흔적도…"국내 유적서는 처음 발견"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기와가 대거 출토됐던 전북 익산토성 일대에서 옻칠한 갑옷의 흔적이 확인됐다.
공주 공산성, 부여 관북리 유적에 이은 세 번째 사례라 관심이 쏠린다.
국가유산청은 익산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함께 발굴 조사 중인 익산토성에서 칠피 갑옷 조각이 출토됐다고 30일 밝혔다.
칠피 갑옷은 옻칠한 가죽을 이어 붙여 만든 갑옷을 뜻한다.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에 원형 구멍이 뚫려 있는 형태의 조각은 6점 확인됐다.
이들 조각은 익산토성의 남쪽에 있는 집수시설 안에서 발견됐다.
이영일 국가유산청 연구관은 "전투를 위해 착용했던 갑옷 조각이 떨어져 집수시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물을 모아두기 위해 만든 집수시설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집수시설은 직경이 동서 9.5m, 남북 7.8m, 최대 깊이는 4.5m에 이르는 거대한 형태다.
1981년 남쪽 성벽을 조사할 당시에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연구관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이남 지역에서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집수시설이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집수시설은 일부가 무너져 내렸으나 하단부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확인됐다.
바닥은 자연 암반을 인위적으로 깎고 다듬은 형태이며, 북동쪽 부분은 물이 가운데로 유입될 수 있도록 암반을 가공한 형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남쪽에는 돌을 이용해 최대 높이가 80㎝에 이르는 단을 쌓았다.
집수시설은 백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한 차례 이상 보수 공사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시설 안에서는 칠피 갑옷 조각 외에도 백제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와 토기 조각 여러 점이 함께 출토됐다.
문서를 분류할 때 쓴 것으로 보이는 목재 막대기도 발견됐다.
직경 2.3㎝ 크기의 원통형 막대기에는 '정사(丁巳) 금재식'(今在食·현재 남아있는 식량이라는 뜻)이라고 적힌 글이 있어 정사년에 성안의 식량을 기록한 문서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문서를 분류할 때 쓴 흔적으로 확인될 경우, 백제 시기 문서 보관 방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자 익산토성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문에 참여한 이병호 동국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의 한 종류인 '봉축'(棒軸)이 국내 유적에서 발견된 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봉축은 문서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쓴 일종의 색인을 일컫는다.
기다란 막대 끝에 문서 이름을 표기해 두루마리 모양의 종이를 펴지 않고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에 남은 '정사년'은 597년 혹은 657년으로 추정되며, 익산토성을 언제 사용했는지 밝힐 근거가 될 전망이다.
함께 발굴된 수막새 등의 제작 시기를 고려할 때 657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분석도 나온다.
이 교수는 "성곽이라는 방어 시설에서 반드시 필요한 식량 저장과 관련한 기록"이라며 "(백제가 멸망한) 660년 전후라는 역사적 상황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조사단은 조사 결과에 대해 "자연 지형을 이용한 유수 관리 방법과 이를 활용한 백제인의 토목 기술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과 익산시,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이날 오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2-2번지 일대 발굴 현장에서 이런 내용을 포함해 그간의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익산토성은 해발 125m의 오금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 유적이다.
일명 '오금산성'으로도 불리며 2017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해 백제의 왕이 기거하는 궁궐에서 썼던 기와를 뜻하는 수부(首府)명 기와 등 백제 기와가 다량 출토된 바 있다.
학계에서는 남쪽으로 약 2㎞ 떨어진 왕궁리 유적과 연계된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