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되는 경우 극히 드물어…'관계 파탄'만으로는 안돼
기존 판례 비판 많았으나 사건 적어 판례 변경까지 40년
이혼뒤 '혼인 무효' 다툴수 있게 됐지만…속았거나 근친혼이어야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이혼 후에도 혼인(결혼) 무효 소송을 낼 수 있게 됐지만 그 여파가 크지는 않을 전망이다.

애초에 이혼과 달리 민법상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제한적이고, 이날 대법원판결이 결혼 무효가 인정되는 범위를 넓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법원판결의 요지는 '이미 이혼으로 혼인관계가 해소됐다고 해도 결혼 자체를 무효로 할 만한 사정이 있으면 소송을 내서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현행 민법 815조는 부부의 결혼을 무효로 하는 사유를 매우 제한적으로 정한다.

당사자 사이에 결혼에 대한 합의가 없는 경우, 8촌 이내의 혈족 간 결혼(근친혼)인 경우, 당사자 사이에 직계인척(시아버지와 며느리 등)이나 직계혈족(양모와 양자 등) 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무효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부가 근친 관계인지 모르고 결혼했다가 이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자 다른 가족이 결혼을 무효로 돌리겠다며 소송을 내는 경우가 있다.

다만 이는 2022년 10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올해 말까지 법이 개정돼야 해 앞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또는 상대방 몰래 혼인 신고서를 냈다거나, 취업·입국을 목적으로 위장 결혼하는 것, 상대를 협박해서 결혼하는 것도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없는 경우'가 돼 결혼 무효 사유가 될 수 있다.

직계인척이나 직계혈족 사이 결혼은 실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까지는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이런 결혼 무효 여부를 법원에서 다퉈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혼한 뒤라도 요건에 맞으면 소송을 내고 법원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게 이번 대법원판결의 의의다.

이혼뒤 '혼인 무효' 다툴수 있게 됐지만…속았거나 근친혼이어야
이번 판결의 원고인 A씨는 '혼인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정신 상태에서 실질적 합의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주장했다가 1·2심에서 각하 판결을 받았는데, 그의 결혼이 실제로 무효가 될 수 있을지는 서울가정법원이 추가 심리를 통해 결정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날 대법원판결에 직접 영향받는 건 부부 사이의 좋고 나쁨과 상관 없이 '근친혼이거나 합의 없이 결혼한 부부(로 법원에서 인정받은 이들)'이다.

이미 이혼했더라도 결혼 무효가 받아들여지면 아예 결혼을 없던 일로 돌리는 것이어서 법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긴다.

대법원 역시 판결 이유를 설명하는 첫머리에 "무효인 혼인과 이혼은 법적 효과가 다르다"고 명시했다.

결혼이 무효가 되면 결혼 생활의 일환으로 생겨난 채무를 함께 갚을 의무가 사라지고, 인척간 결혼을 금지하거나 부부간 형사책임을 일부 면제하는 법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다.

반대로 부부 한쪽이 연금 수급자일 경우 받는 분할연금은 받을 수 없다.

결혼이 무효가 됐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외 출생자'가 된다.

다만 가족관계등록부는 결혼 무효 사유가 한쪽 당사자나 제3자의 범죄행위로 인한 경우가 아니면 결혼 이력을 아예 삭제할 수는 없다.

이처럼 결혼을 무효로 돌리면 바뀌는 게 많기 때문에 1984년에 나온 기존 대법원 판례를 비판하는 견해도 많았다.

1984년 판례는 이미 이혼했다면 무효로 돌릴 실익이 없어서 소송 자체가 부적법하다고 봤다.

이 판례가 40년간 유지된 것은 결혼 무효가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가능해 소송 건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혼인 무효·취소 소송은 총 643건(1심 기준)으로 전체 가사소송의 1.5%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법원이 처리한 644건 중 청구가 일부라도 받아들여진 것은 368건이다.

게다가 혼인이 무효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이혼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무효 소송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혼한 뒤에 내는 경우는 무효 소송 중에서도 거의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법원이 상고심 사건을 접수해 판례 변경을 검토할 기회 자체가 드물었던 셈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