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노동운동가 故 남현섭씨 이름 붙인 기금 조성
일터에서 손가락 잃고 산재노동자 상담…파쇄기 사고로 숨져
"산재 추방 운동하다 산재 사망"…기금 조성돼 노동자들 돕는다
"산재를 당해서 산재 추방 운동을 하다가 산재로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산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산재가 노동자 개인이 조심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주는 증인이었어요.

"
'국제 산업재해 사망·부상 노동자 추모의 날'(4월 28일)을 나흘 앞둔 지난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름다운재단에서 '남현섭기금' 협약식이 열렸다.

2016년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운동가 고(故) 남현섭 인천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인천산재노협) 사무국장의 이름을 따왔다.

협약식에는 임상혁 녹색병원장 등 고인의 옛 동료와 아름다운재단 관계자 30여명이 참석했다.

고인과 20여년 동안 노동운동을 함께한 김신범(54)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이 산재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아 펴낸 책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의 인세 500만원이 기금의 종잣돈이 됐다.

한양대 86학번이었던 남씨는 대학을 중퇴하고 공장으로 향했다.

'학출'(학생운동권 출신 공장노동자)이 치열하게 활동하던 때였으나 김 부소장조차 그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사후에야 알았다.

남씨는 스물다섯 살 때인 1992년 공장 프레스 기계에 오른손이 눌려 손가락 네 개를 잃었다.

산재 피해자가 된 그는 입원한 병원에서 노동법을 공부했다.

퇴원 뒤 남씨는 서울 구로구와 인천의 산재노협 상담부장을 맡아 공단 인근의 병원들을 바쁘게 오가며 다친 노동자의 산재 신청을 도왔다.

김 부소장은 "당시에는 산재 관련 시스템이 미비했고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며 "노동자들이 스스로 움직여 정보를 주고받던 때 (남씨의) 활동이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산재 추방 운동하다 산재 사망"…기금 조성돼 노동자들 돕는다
1998년 공장에서 왼손가락을 잃은 박영일(47)씨는 입원 중 남씨를 처음 만났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와서 산재가 무엇이고 어떻게 신청할 수 있는지 열변을 토하더라고요.

한 가지를 알려줘도 정확하게 알려줘야겠다며 계속 공부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항상 웃고 사람들에게 짜증 한번 못 내는 형이었어요.

"
남씨의 꿈은 소박했다.

그는 생전 소식지에 기고한 글에서 "먹고 살 만큼만 일해서 벌고 내 반쪽이랑 신나게 여행도 다니고 욕심 없이 살면서 평생 옥신각신 싸우기도 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조그만 소망"이라고 했다.

남씨는 2011년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산재노협을 나와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산재보험 시스템이 점차 자리 잡고 노무사 등 산재 노동자들을 도울 사람이 많아진 것 역시 노동운동을 멈춘 배경이 됐다.

남씨가 사망한 것은 2016년 3월이다.

경기 시흥시의 스티로폼 파쇄업체에 취업한 지 한 달여 만에 파쇄기에 상반신이 끼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남씨가 숨진 공장은 직원이 그와 공장장 두 명뿐인 영세 사업장이었다.

"산재 추방 운동하다 산재 사망"…기금 조성돼 노동자들 돕는다
2008년부터 남씨와 함께 활동한 전지인(44)씨는 그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현섭이 형이 사망하기 전 파쇄기가 위험하니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안전난간을 설치해달라는 부탁했지만 무시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고 당시에도 형 혼자뿐이었고요.

사장은 '단 하나의 잘못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형의 죽음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늘 마음에 있습니다.

"
김 부소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을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를 일벌백계해 노동자들이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도록 돕는 대화의 도구"라며 "정부와 재계가 범법자를 만들지 말라고만 할 게 아니라 영세 사업장이 제대로 산재를 예방할 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현섭기금은 청년 여성 산재 피해자의 회복을 지원하는 등 노동 현장의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산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 쓰일 예정이다.

아름다운재단이 노동 영역 기금에 특정인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름다운재단은 기금의 취지에 공감하는 시민에게서도 기부받을 계획이다.

김진아 사무총장은 "기금이 산재의 실태를 우리 사회에 알리고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협약식은 고인이 생전 좋아했던 막걸리 건배로 마무리됐다.

건배사는 "산재 없는 세상"이었다.

"산재 추방 운동하다 산재 사망"…기금 조성돼 노동자들 돕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