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번 김수영 '거대한 뿌리'로 시작한 한국 대표 시선 시리즈
2002년 이후 맥 끊겼다가 허연 '밤에 생긴 상처'로 재개
반세기 전통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22년 만에 돌아왔다
한국의 대표 시선(詩選)으로 꼽히는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가 마지막 선집 간행 이후 22년 만에 새 선집으로 돌아왔다.

민음사는 올해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의 50주년을 맞아 시인 허연의 '밤에 생긴 상처'를 총서 23번으로 펴냈다고 25일 밝혔다.

허연(58)은 청춘의 상징과도 같은 가치인 불온함을 인간의 실존적 가치로 승화시켜 꾸준히 노래해온 시인으로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받아왔다.

그의 데뷔시집 '불온한 검은 피'(1995)는 출간된 지 약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매년 3천부 이상의 증쇄를 거듭하고 있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시선 '밤에 생긴 상처'에서는 동시대 한국 시단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의 허연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시들이 엄선돼 담겼다.

반세기 전통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22년 만에 돌아왔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하관식이 이뤄지던 순간의 감각을 담은 '권진규의 장례식'을 비롯해 "몰락은 사족 없이도 눈부시다"고 노래한 '몰락의 아름다움',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이라며 생의 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나의 마다가스카르3' 등 허연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시 47편이 수록됐다.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허연의 시는 사랑을 통해 자기 완결성이라는 폐쇄적 개인주의가 아닌 무한한 개인주의로 나아간다"며 "그의 혈관에는 여전히 '불온한 검은 피'가 흐르고, 홀로 검은 그의 시는 그가 우리에게 양도한 빛의 증거"라고 평했다.

23번째를 맞은 '오늘의 시인 총서'는 민음사가 현대시의 정전(正典)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1974년 시작한 시리즈다.

당시까지 시집 출판은 대개 자비로 이뤄지거나 양장본으로 찍어 소수의 문학 애호가에게만 판매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런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길게 만들어 한 손에 들고 읽을 수 있는 현재의 시집 판형이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 바로 '오늘의 시인 총서'였다.

한 시인을 선정한 뒤 그의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엄선해 수록하는 이 시선은 한국 동시대 시의 지형을 예리하게 보여주는 시선으로 꼽힌다.

총서 1번은 김수영(1921~1968)의 '거대한 뿌리'였다.

변변한 시집 한권 내지 못한 채 요절한 불운한 시인이었던 김수영의 사후 6년 뒤 출간된 이 선집은 출간 후 3년간 3만부가 팔려나가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세기 전통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22년 만에 돌아왔다
'오늘의 시인 총서'의 발간사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문학의 교과서적 선언으로 남아있다.

문학평론가 김현(1990년 작고)은 1974년 발간사에서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촉수를 이룬다"면서 "우리가 오늘의 시인 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총서에는 제2번 김춘수 '처용'을 비롯해, 3번 천상병 '주막에서', 9번 황동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11번 정현종 '고통의 축제', 12번 오규원 '사랑의 기교', 13번 강은교 '풀잎', 16번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포진했다.

직전에 나온 총서는 2002년 출간된 22번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었다.

그 이후 22년간이나 총서가 발행되지 않은 것은 급변하는 문학·출판 환경에서 시선집이라는 형태의 유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기존에 다른 출판사들에서 출간된 시집에서 시를 뽑아 재수록해야 하는 난점 등의 이유에서였다.

민음사 관계자는 "선집(選集) 형태가 오늘날 그리 유효하지 않은 형식이 되어서 20년 넘게 책이 나오지 못했는데, 작가의 대표작을 선정해 소개하는 것이 독자와 시인 모두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 방식이라고 판단해 출간을 재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음사는 앞으로도 한국문학에 남긴 자취가 뚜렷한 시인을 엄선해 계속해서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낼 계획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