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가다] '수교' 또박또박 글씨…한글학교 학생들 "이것도 인연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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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유일 한글학교, 2022년 정식 설립·120여명 '열공'…교사, 학생 모두 한국어 이름
정호현 교장 "수교 계기 학생들 한국어 열의 더 커져"…한국어 수준급 실력자도 여럿
'양질의 교재 확보' 이구동성 희망…"한국 원어민과 대화하고 싶어요" 바람도 "글로만 봤던 인연이 이런 거네요"
17일(현지시간) 걸어서 5분이면 에메랄드빛 카리브해 파도와 만날 수 있는 쿠바 아바나의 한국문화센터·한글학교에서는 어른 손바닥만 한 태극기 7개가 창문에 걸린 채 살랑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도로에서는 언뜻 지나칠 수 있을 만큼 눈에 잘 띄진 않는 크기지만, "쿠바에서 거의 유일하게 밖에서 태극기를 볼 수 있는" 장소다.
이 곳은 쿠바에 있는 유일한 한국학교다.
쿠바 검찰청사와 유엔 산하 사무소 옆 안전하고 조용한 미라마르 지역에 위치한 1층짜리 건물의 문을 들어서니 한국어가 맨 먼저 방문객을 반겼다.
교실에서는 주말인데도 9명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시험지 인쇄물을 교재로 삼아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쿠바 주민들이었다.
교사인 켄디 토레스(34) 씨는 "1∼4학년 중 2학년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교재를 보니 예컨대 '잡수세요, 드세요, 먹어요'처럼 외국인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높임말과 기본 생활에 필요한 대화 표현 등을 중점적으로 배우는 단계였다.
'혹시 수교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 물어보니 몇몇 학생들은 곧바로 획을 그어 내려갔다.
교사의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큰 소리로 글자를 읽어 보기도 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한국인 '쿠바 영주권자 1호' 주민인 정호현(51) 한글학교장은 "한국과 쿠바 수교를 계기로 모두 한국어 실력을 키우려는 열의가 더 커졌다"며 "교류가 점점 늘어나면, 한국 기업 입사 등 한국어 지식을 활용할 가능성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치가 상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쿠바 한글학교는 2022년에 옛 재외동포재단(현 재외동포청)의 지원을 받아 개교했다.
주멕시코 대사관으로부터 재외교육 기관 등록증을 받았고, 쿠바에서도 정식 사립학교로 승인을 얻었다.
애초 쿠바에는 2012년 아바나국립대에 개설된 한국어 강좌가 있었다.
이 수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2018년께 중단됐다.
중간중간 한인 후손 등이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열악한 재정 상황 등으로 문을 닫았다.
한글학교는 문을 연 직후부터 현지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한류 팬들의 입학 문의가 줄을 이었는데, 현재 120여명의 학생은 대부분 K팝 또는 K드라마를 좋아하게 되면서 한국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 케이스다.
정 교장을 포함, 교사는 4∼5명 수준으로 유지돼왔다.
학생들 연령대는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하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있다.
특이한 점은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각자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한자의 뜻까지 꼼꼼히 공부해 자신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교실에서 만난 교사 토레스는 자신을 '강해주'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바다의 진주'라는 뜻이라고 했다.
학생 '신양'(21·본명 라첼 페레스) 씨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종교적 의미가 담겼다"며 "라첼이라는 내 원래 이름에도 그런 뜻이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운명'이라는 이름을 쓰는 브리안 캄포스(17) 군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좋았다"고 했다.
교육 시스템은 체계적이다.
1년 2학기 제로, 실력에 따라 12개 반 중 하나에 학생들이 들어간다.
반마다 수업 일자가 다르긴 하나, 휴일과 방학을 제외하곤 일주일 내내 학교 문이 닫히진 않는다.
정 교장은 "많지 않지만, 학비도 받는다"며 "학생들은 의무감과 열의를 갖고 학업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어 실력이 상당한 학생들도 여럿 있다.
지난해 10월 쿠바에서 치러진 한국어능력시험에서는 한국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의 점수를 받은 학생이 수십명 나왔다고 한다.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양국 외교 관계 수립을 통해 바라는 것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양질의 교재와 교육용 자료 확보'를 꼽았다.
미수교 상태에서는 한국어로 된 책들을 한꺼번에 받는다든지 하는 과정과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유튜브 등을 통해 순수 독학으로 배운 뒤 한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준'(22·프랑 다비드 나폴레스) 씨는 "지금까지는 한국어와 관련된 교재나 책을 받는 게 우리 한글학교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웠다"며 "(관련 절차가) 쉬워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학교 측에서는 교통난이 심각한 이 나라에서 셔틀버스 운영 등으로 더 많은 학생이 손쉽게 학교에 오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한국의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성격의 이 나라 예술 분야 최고 대학(ISA·Instituto Superior de Arte)에 입학을 앞둔 21살 동갑내기 '은진주'(본명 그레첸 아코스타)·'신양' 씨는 "한국 원어민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그러면서 "맘 맞는 친구들 6명이 요새 함께 연습하는 게 있다"며 교실에서 가수 이선희의 '인연'을 직접 불러줬다.
당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긴 어려운 '국가 간 수교'를 친밀감 넘치는 '사람 간 인연'으로 여기는 것 같은 두 청년의 노랫말은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분명하게 전달됐다.
/연합뉴스
정호현 교장 "수교 계기 학생들 한국어 열의 더 커져"…한국어 수준급 실력자도 여럿
'양질의 교재 확보' 이구동성 희망…"한국 원어민과 대화하고 싶어요" 바람도 "글로만 봤던 인연이 이런 거네요"
17일(현지시간) 걸어서 5분이면 에메랄드빛 카리브해 파도와 만날 수 있는 쿠바 아바나의 한국문화센터·한글학교에서는 어른 손바닥만 한 태극기 7개가 창문에 걸린 채 살랑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도로에서는 언뜻 지나칠 수 있을 만큼 눈에 잘 띄진 않는 크기지만, "쿠바에서 거의 유일하게 밖에서 태극기를 볼 수 있는" 장소다.
이 곳은 쿠바에 있는 유일한 한국학교다.
쿠바 검찰청사와 유엔 산하 사무소 옆 안전하고 조용한 미라마르 지역에 위치한 1층짜리 건물의 문을 들어서니 한국어가 맨 먼저 방문객을 반겼다.
교실에서는 주말인데도 9명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시험지 인쇄물을 교재로 삼아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쿠바 주민들이었다.
교사인 켄디 토레스(34) 씨는 "1∼4학년 중 2학년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교재를 보니 예컨대 '잡수세요, 드세요, 먹어요'처럼 외국인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높임말과 기본 생활에 필요한 대화 표현 등을 중점적으로 배우는 단계였다.
'혹시 수교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 물어보니 몇몇 학생들은 곧바로 획을 그어 내려갔다.
교사의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큰 소리로 글자를 읽어 보기도 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한국인 '쿠바 영주권자 1호' 주민인 정호현(51) 한글학교장은 "한국과 쿠바 수교를 계기로 모두 한국어 실력을 키우려는 열의가 더 커졌다"며 "교류가 점점 늘어나면, 한국 기업 입사 등 한국어 지식을 활용할 가능성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치가 상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쿠바 한글학교는 2022년에 옛 재외동포재단(현 재외동포청)의 지원을 받아 개교했다.
주멕시코 대사관으로부터 재외교육 기관 등록증을 받았고, 쿠바에서도 정식 사립학교로 승인을 얻었다.
애초 쿠바에는 2012년 아바나국립대에 개설된 한국어 강좌가 있었다.
이 수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2018년께 중단됐다.
중간중간 한인 후손 등이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열악한 재정 상황 등으로 문을 닫았다.
한글학교는 문을 연 직후부터 현지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한류 팬들의 입학 문의가 줄을 이었는데, 현재 120여명의 학생은 대부분 K팝 또는 K드라마를 좋아하게 되면서 한국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 케이스다.
정 교장을 포함, 교사는 4∼5명 수준으로 유지돼왔다.
학생들 연령대는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하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있다.
특이한 점은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각자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한자의 뜻까지 꼼꼼히 공부해 자신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교실에서 만난 교사 토레스는 자신을 '강해주'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바다의 진주'라는 뜻이라고 했다.
학생 '신양'(21·본명 라첼 페레스) 씨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종교적 의미가 담겼다"며 "라첼이라는 내 원래 이름에도 그런 뜻이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운명'이라는 이름을 쓰는 브리안 캄포스(17) 군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좋았다"고 했다.
교육 시스템은 체계적이다.
1년 2학기 제로, 실력에 따라 12개 반 중 하나에 학생들이 들어간다.
반마다 수업 일자가 다르긴 하나, 휴일과 방학을 제외하곤 일주일 내내 학교 문이 닫히진 않는다.
정 교장은 "많지 않지만, 학비도 받는다"며 "학생들은 의무감과 열의를 갖고 학업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어 실력이 상당한 학생들도 여럿 있다.
지난해 10월 쿠바에서 치러진 한국어능력시험에서는 한국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의 점수를 받은 학생이 수십명 나왔다고 한다.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양국 외교 관계 수립을 통해 바라는 것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양질의 교재와 교육용 자료 확보'를 꼽았다.
미수교 상태에서는 한국어로 된 책들을 한꺼번에 받는다든지 하는 과정과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유튜브 등을 통해 순수 독학으로 배운 뒤 한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준'(22·프랑 다비드 나폴레스) 씨는 "지금까지는 한국어와 관련된 교재나 책을 받는 게 우리 한글학교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웠다"며 "(관련 절차가) 쉬워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학교 측에서는 교통난이 심각한 이 나라에서 셔틀버스 운영 등으로 더 많은 학생이 손쉽게 학교에 오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한국의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성격의 이 나라 예술 분야 최고 대학(ISA·Instituto Superior de Arte)에 입학을 앞둔 21살 동갑내기 '은진주'(본명 그레첸 아코스타)·'신양' 씨는 "한국 원어민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그러면서 "맘 맞는 친구들 6명이 요새 함께 연습하는 게 있다"며 교실에서 가수 이선희의 '인연'을 직접 불러줬다.
당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긴 어려운 '국가 간 수교'를 친밀감 넘치는 '사람 간 인연'으로 여기는 것 같은 두 청년의 노랫말은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분명하게 전달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