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은 해외 도주…구제길 막막해 극단적 선택까지
세입자 동의 100% 얻어야 경매중단·우선매수권 활용…특별법 '무용지물'
대전서 '미추홀 비극' 되풀이…'특별법 사각지대' 다가구 밀집탓
석 달 동안 피해자 4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이 마련됐지만, 인천 미추홀구에서 있었던 일이 대전에서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지난 6월 30일 숨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A(50)씨는 특별법의 사각지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전세사기 피해자다.

똑같이 전세사기를 당했지만, 다가구 빌라 거주자였던 A씨에게 특별법의 주요 지원책인 거주 주택 경·공매 유예 및 정지, 우선매수권 부여, 매입임대주택 전환 등은 '그림의 떡'이었다.

◇ 전세사기 건물 11채 두고 해외 도주한 집주인
23일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A씨가 전세사기를 당한 대전 중구 선화동 다가구 4층 빌라에는 총 19세대가 있다.

1층 3세대를 제외한 2∼4층 16세대가 5천만원∼1억2천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다.

A씨를 비롯한 세입자들이 전세사기 피해를 인지한 것은 지난 6월 29일이었다.

집주인 남모(48) 씨가 소유한 다른 빌라의 피해자들을 통해서다.

남씨가 A씨 빌라 1층에 주소를 두고 있기에 다른 피해자들이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한 뒤 찾아와본 것이다.

A씨의 이웃인 B씨는 "전세계약 연장 의사가 없어 5월 초부터 집주인에게 연락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의아하던 터였다"며 "집주인이 해외로 도주했다는 것도 다른 피해자들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찾아낸 남씨 명의 다가구 빌라만 대전에 11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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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입자 동의 100%' 요건에 경매중단 난항
피해자들로선 똑같이 전세사기를 당한 것이지만, 다가구는 다세대 빌라와 달리 적용받을 수 있는 지원책이 극히 한정돼 있다.

다가구는 다세대와 달리 개별 등기를 할 수 없어 건물 한 채를 통으로 본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 경매에 나오더라도 세대별로 경매가 진행되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가 한꺼번에 넘어간다.

낙찰되면 선순위 권리자부터 차례로 돈을 회수해가기 때문에 계약 시기가 빠른 세입자는 보증금을 돌려받고, 계약을 늦게 한 세입자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할 수 있는 구조다.

여기서 다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경매를 막으려면 세입자 전체의 동의가 필요한데, 하루속히 경매를 진행해 보증금을 챙긴 뒤 떠나고 싶어 하는 선순위 세입자와 쫓겨나지 않으려면 경매 진행을 막아야 하는 후순위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특별법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내쫓기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공매 유예와 정지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국토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에서 다가구의 긴급한 경매 유예 신청 건은 100% 동의율을 얻지 못해 안건으로 오르지도 못하고 있다.

피해지원위원회 관계자는 "위원회에서 논의를 여러 차례 했지만, 본인의 배당(전세보증금)을 받아 갈 수 있는 임차인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어 다가구주택 경매 중단 신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경매 유예 결정을 내리기 직전 한 임차인이 연락해 "보증금을 절반이라도 돌려받고 싶다"면서 반대해 의결 대상에서 뺀 사례도 있다.

해당 빌라 세입자들도 이 문제를 모르진 않았다.

그런데 집주인 남씨는 선순위 보증금을 실제보다 낮게 속이는 방식으로 전세 계약을 맺어 세입자들이 '나는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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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가구, 우선매수권·LH 매입임대활용도 어려워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 경매에 나온다면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은 우선매수권을 활용해 세입자가 떠안거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우선매수권을 양도한 뒤 매입임대로 거주하는 것이다.

다가구는 이 역시 어렵다.

우선매수권도 세입자가 10명이라고 하면 10명 모두 동의해야 쓸 수 있다.

LH 매입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다가구 전세사기가 유독 몰린 대전에선 피해 주택이 하나둘 경매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내쫓긴 피해자도 있다.

현모(31) 씨는 전세금 1억1천만원을 돌려받지 못하고 지난 12일 이사했다.

집이 경매로 나온다고 해도 다가구에다 전세사기 주택이니 쉽사리 낙찰되지 않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두 번 유찰을 거치며 가격이 내려가자 바로 낙찰자가 나왔다.

새 집주인은 현씨에게 "전세 아닌 월세만 받겠다"며 비싼 가격을 불렀고, "월세로 재계약할 게 아니라면 한 달 안에 나가달라"고 통보했다.

끝까지 버티고 살면서 새 집주인에게 보증금 반환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선순위 대출 근저당으로 경매가 진행되면 근저당 설정 이후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은 대항력을 주장할 수 없어 나가야 한다.

현씨는 "결국 퇴직금을 정산받아 이사할 집을 구했다"며 "같은 다가구 빌라에 살던 12가구 중 두세 가구를 빼고 대부분이 이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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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서 다가구 5곳 경매로…내쫓긴 피해자 속출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창식(41) 씨가 사는 16세대 다가구 빌라도 조만간 경매 절차가 시작된다.

정씨에게 보증금 2억8천만원은 20∼30대를 거치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자, 20년간 부은 청약통장으로 분양받은 아파트 중도금을 치를 돈이었다.

새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 계약 만료 6개월 전 집주인에게 연장 의사가 없다고 통보한 상태에서 계약 만료 일주일 전부터 집주인과 연락이 끊겼다.

정씨는 "대전에서는 2020∼2021년 지어진 새 빌라가 시세보다 30∼40% 낮은 상태로 경매에 나오다 보니 낙찰이 빠르게 되는 편"이라며 "운이 안 좋으면 바로 낙찰될 텐데, 그러면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정씨는 특별법상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상태지만, "다가구 피해자는 딱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없더라"고 실망감을 토로했다.

경매를 막아보려고 이리저리 뛰고 있지만 세입자 100%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책위에 따르면 올해 1월 유성구 전세사기 건물을 시작으로 지난달까지 대전에서 다가구 빌라 총 5곳의 매각이 완료됐다.

대책위가 파악한 대전 다가구 전세사기 피해자는 300여명, 피해 추정액은 276억원에 이른다.

권지웅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피해고충접수센터장은 "다가구주택 피해자와 근린생활시설, 상업용 오피스텔 등 비주거용 주택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특별법 앞에서 두 번 울고 있다"며 "이들에게 특별법은 사실상 없는 것과 같고, 사각지대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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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우선변제금 기준서도 벗어난 대전 피해자
특별법상 대출 지원을 이용할 수 있지 않냐는 물음에 피해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대전 다가구 피해자 김모(36) 씨는 "여러 대출 지원책이 나왔다고 하지만 은행에 가면 어떤 곳에선 된다, 어떤 곳에선 안된다, 말이 다 다르다"며 "지침이 내려온 게 없다던가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다"고 말했다.

정창식 씨도 "정부에서는 지침을 내렸다고 하는데, 금융기관에 제대로 전파가 안됐고 정부도 대출 지원이 어느 은행에서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은 상태였던 숨진 A씨에겐 소액 임차인이 기대 볼 수 있는 최우선변제금도 적용되지 않았다.

최우선변제금은 세입자가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더라도 은행 등 선순위 권리자보다 앞서 배당해주는 것으로, 대전지역 현재 기준이 보증금 8천500만원 이하다.

그러나 A씨가 전세 계약을 한 작년 7월엔 기준이 7천만원이었고, 이마저도 해당 빌라에 2011년 근저당이 설정돼 2011년 기준인 5천500만원 이하여야 최우선변제금을 받을 수 있었다.

사망 당일 아침, A씨는 다른 세입자들에게 "돈 받기는 틀렸다"는 말을 남겼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