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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로 만들면 성공하는 이야기의 공식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한 편의 뮤지컬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뿐 아니라, 그것을 객석에 보이고 들리도록 하는 데에 필요한 수많은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처럼 뮤지컬로 제작했을 때 실패할 확률을 줄여주는 이야기의 씨앗은 있을 법하다.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수많은 잠재적 구성 요소들 중 최적의 것들만 선택하여 결합한 이야기는 우리 삶이나 역사보다 더욱 합리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 씨앗은 사진, 광고 전단, 신문 기사, 노래 가사 등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얻은 아이디어일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 인물의 전기 등 이야기의 재료가 있는 것이거나, 소설이나 영화 등 이미 이야기가 완성된 인접 장르의 저작물일 수도 있다. 따라서 뮤지컬의 씨앗이란 원천 아이디어부터 완성된 이야기까지의 스펙트럼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될성부른 뮤지컬의 이야기’란 과연 어떤 것인가.

첫째, 이야기의 원재료가 두 시간 반가량의 상연에 적합하게 응축될 수 있거나, 반대로 그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는 분량이어야 한다. 소설은 기억나지 않거나 이해하기 힘들면 몇 번이고 뒤적여 다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관극 한 번으로 기승전결을 따라가야 하는 뮤지컬은 관객이 이해하고 감상할 뿐 아니라, 기억하고 감동하기에 적합한 크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삼국지보다는 적벽대전이, 임진왜란보다는 명량이 뮤지컬에 더 적합하다는 얘기다. 전통적으로 16~24부작, 미니시리즈로는 12~16부작인 한국 TV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많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은 더욱 많지 않은 것, 세계적으로 TV드라마보다는 러닝타임이 비슷한 영화나 희곡 원작의 뮤지컬이 더 많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가 너무 짧으면 깊고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힘들어 충분한 감동을 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단 한 장의 사진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진 ‘미스 사이공’은 원재료 확장의 좋은 예다. 베트남전 패전으로 철수하는 미군에게 입양되어 울며 떠나는 어린 딸과, 애써 눈물을 감추며 딸을 떠나보내는 엄마를 담은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이 잉태한 한 여인과 가정의 비극을 담은 두 시간 반 분량의 대극장 뮤지컬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진=뮤지컬무대
사진=뮤지컬무대
둘째, 이야기의 흐름이 극적(劇的)이어야 한다. 뮤지컬 역시 ‘극(劇, Drama)’의 하위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심할’ 극(劇)이라는 한자에서 유추되는 ‘극’의 함의는 곧 ‘죽음’, ‘낙차 큰 변화’와 같다. 인간에게 죽음만큼 지독한 상황은 없으며, 삶에서 죽음으로의 변화만큼 커다란 낙차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의 존 폴리도리는 3년 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버려두었던 소설 ‘뱀파이어 테일’이 만우절 아침 거짓말처럼, 그것도 자신이 아닌 바이런 경의 이름으로 출간된 것에 경악한다. ‘지킬앤하이드’의 지킬은 뇌사 상태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약물의 실험 대상이 되지만, 그로 인해 내면의 또 다른 자아 하이드를 깨워 악행을 저지르게 한다. 이렇듯 이야기의 낙차 큰 변화는 늘 주인공과 관객의 뒤통수를 치며 전개되고, 이때 비로소 관객은 두 시간 반 동안 비좁은 객석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한 채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혹시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로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면? 차라리 물을 비벼 불을 피우라 권하고 싶다.

셋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상과 충돌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여야 한다. 흑인은 백인과 함께 수도꼭지조차 사용할 수 없던 인종차별의 시대, 뮤지컬 ‘멤피스’의 백인 휴이는 방송국 부스에 난입해 제멋대로 흑인 음악을 틀고, 흑인 가수 펠리샤와 공개적으로 연애하고 싶어 한다.

여성은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뮤지컬 ‘레드북’의 안나는 야한 상상을 즐기고, 첫사랑과의 추억을 담은 소설을 발표하여 남성 기득권 세력의 표적이 된다. 이렇듯 누구든 알고 있는 정의이지만 각박한 현실에 얽매여 차마 나서지 못하는 관객에게 사고뭉치인 주인공은 대리만족의 매개자가 되고, 나아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 대상이 된다.

넷째, 이야기의 결과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구현되어야 한다.1) 등장인물들은 그 행동의 선악에 따라 상벌을 받아야 하며, 보편적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 상업 뮤지컬은 같은 시공간에 운집한 대중이 함께 관람하기에, 작품 내용과 주제가 공적 윤리나 정의에 위배되면 관객은 불쾌감을 느끼고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극단적인 예일는지 모르나 ‘영웅’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뒤 환호하며 해피엔딩을 맞는다면 과연 객석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질 수 있을까? ‘젠틀맨스 가이드’의 몬티가 자기 앞 상속자들을 제거한 뒤 백작의 자리에 오르며 막이 내릴 때, 숨어서 그를 노려보며 앞주머니 속의 독약을 꺼내드는 다음 상속자가 없었다면 과연 이 작품이 성공한 뮤지컬 코미디가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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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야기의 함의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유효해야 한다. 하반기 개막작 ‘컴프롬어웨이’는 9·11 테러 당시 인류애를 꽃피웠던 캐나다의 섬마을 갠더의 실화를 소환한다. 수년간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와 갖가지 인재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작품이다.

‘웃는 남자’,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프랑켄슈타인’, ‘은하철도의 밤’ 등 고전 혹은 그 반열에 오른 원작의 뮤지컬이나, 각각 오르페우스 신화와 오즈의 마법사를 변주한 ‘하데스 타운’, ‘위키드’ 같은 작품이 지속적으로 공연되는 것은, 본래 이야기가 지닌 가치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 우리의 내면에도 동질의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거 황금기의 명작이라도 현대에 다시 공연될 때 성평등이나 정치적 올바름 등의 관점에 비추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수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렇듯 한 편의 뮤지컬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씨앗이 되는 이야기의 양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뮤지컬 역시 생물이기에 예외 없는 법칙을 적용하기란 어렵다. 더군다나 실험성이 짙을수록, 소수 마니아 위주의 작품일수록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은 범인의 예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술한 이야기의 양태는 인간 본성을 다룬 다양한 작품으로부터 뽑아낸 보편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제시된 것이기에 어느 수준 이상의 지침이 된다. 좋은 이야기를 담은 우리 창작 뮤지컬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1)본 칼럼 2회 「작가는 왜 주인공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참고.
https://www.arte.co.kr/stage/theme/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