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핵심연구원 이직금지, 정당하다"…판결 핵심된 두가지는
사건번호:2022카합21499
반도체 경쟁 치열 …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 확립해야
서약서 내용·재직기회 제공 확인돼 삼성 손 들어줘
이직·창업 금지 목적의 서약서 약정을 둘러싼 근로자들과 기업 간 법적 다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서약서 약정은 근로자가 원래 속해 있던 기업의 민감한 기술정보 또는 영업기밀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유효한 조항으로 인정받아 왔다.
경업·전직을 금지하는 기간이 근로자 직업선택의 자유나 근로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판단하는 사례도 적지 않지만, 기업의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단 근거는 ‘꼼꼼한 서약서 내용’과 ‘재직 기회 여부’였다. 차세대 전략산업으로 꼽히는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산업계에서는 인력 유출이 잦아 법적 분쟁이 꾸준히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판단 핵심은 '서약서·재직 기회'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60부(임해지 부장판사·사건번호:2022카합21499)는 삼성전자가 미국 반도체업체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최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A씨는 2024년 4월까지 마이크론이나 그 계열사에 고용되거나 이곳의 D램 연구개발 업무에 종사할 수 없다"고 했다.

1998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A씨는 D램 설계 업무를 맡아왔다. 선임연구원, 수석연구원, 프로젝트 리더(PL) 등을 지냈다. 그는 작년 4월 퇴사하면서 "앞으로 2년간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전직 금지 약정)를 삼성전자에 제출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3개월 뒤 A씨는 마이크론 일본지사에 입사했고 올 4월부터는 미국 본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론은 작년 1분기 기준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3위에 오른 곳으로 삼성전자의 주요 경쟁사 중 하나다.

삼성전자는 약정 위반을 근거로 A씨에 대한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전자 측은 "D램 설계 관련 기술은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됐다"며 "퇴사한 지 2년도 안 돼 경쟁업체로 이직한 것은 영업비밀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전직 금지 약정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2년이란 기간도 과하다"며 "직업의 자유를 과하게 제한하므로 약정은 무효"라고 맞섰다. 그는 특히 전직 금지약정 자체가 직업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민법 제103조에서 정한 ‘선량한 풍속 및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라고 주장했다.
A씨가 삼성전자에 제출한 서약서 일부.
A씨가 삼성전자에 제출한 서약서 일부.
법원은 삼성전자 측 손을 들어줬다. A씨가 작성한 서약서를 판단의 핵심 근거로 삼았다. 재판부는 "A씨는 20년 넘게 D램 업무를 담당하며 삼성전자가 쌓은 기술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며 "A씨 스스로 서약서에 영업비밀 항목을 기재한 만큼 정보가 유출될 경우 삼성전자에 손해가 될 수 있었음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어 "반도체 분야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고려하면 직업선택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더라도 약정이 유효라고 볼 만한 공공의 이익이 있다"고 했다.
A씨가 직접 기재한 삼성전자 영업기밀 목록.
A씨가 직접 기재한 삼성전자 영업기밀 목록.
법원은 기업이 이직을 계획하는 직원에게 또 다른 근로 기회를 제공했는지 여부도 중요하게 봤다. 재판부는 "삼성전자는 퇴직을 희망한 A씨에게 1억원의 특별 인센티브를 제안하고 해외 근무 기회와 사내 대학원 부교수직 보임 기회 등을 제안했으나 A씨는 모두 거절했다"며 "금전 보상이 없었다고 해도 약정이 무효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직업의 자유 vs 공공 이익

삼성전자는 지난해에도 핵심 연구원의 이직 문제로 법정에서 공방을 벌여 승소했다. 수원지방법원 민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세윤·사건번호:2022카합10023)는 지난해 4월 삼성전자가 전 직원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전직 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B씨는 삼성전자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재직하던 2020년 8월께 퇴사했다가 다음 해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입사했다. B씨는 삼성전자 메모리 소프트웨어 개발팀 등에서 근무했고, 퇴직 당시 ‘퇴사 후 2년간 회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업체에 취업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해 사측에 제출했다. 서약서엔 경쟁업체와 관련해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계열사 이름이 명확하게 명시돼 있었다.

B씨는 재판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전직 금지약정이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무효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B씨가 삼성전자 재직 당시 회사의 노하우와 핵심 기술을 취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점과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제품 개발 업무 담당자로 참여한 점을 바탕으로 삼성전자가 B씨의 전직을 2년간 금지한 것은 정당하다고 봤다.
SK 하이닉스 사옥. 사진=연합뉴스
SK 하이닉스 사옥. 사진=연합뉴스
재판부는 “삼성전자 SSD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봤을 때 SK하이닉스 등 경쟁업체와 기술적 격차가 있고, B씨가 삼성전자에서 관여한 기술 체계는 유용한 정보로 가치가 있다”며 “삼성전자의 SSD 기술 관련 연간 매출액이 상당한 점에 비춰봤을 때 A씨가 삼성전자 재직 당시 취득한 기술과 정보가 SK하이닉스에 유출된다면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동등한 사업적 능력을 갖추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상당 기간 단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B씨에게 전직 금지약정의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점도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삼성전자는 “전직 금지약정의 대가로 1억원을 지급하겠다”는 제안했지만 B씨가 이를 거절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