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생생한 장진호의 기억 "몸에 50㎏ 포탄…투시롤 먹고 버틴 열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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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참전용사가 회상한 전투…영하40도 혹한 속 "중공군이 개미처럼 밀려왔다"
힘겨운 철수, 美육군 절반 이상은 돌아오지 못해…"우리는 결코 후퇴하지 않았다" 1950년 11월 말 한국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7보병사단 31연대에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함경남도 장진시에 있는 장진호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2개월 전인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킨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맹 진군하고 있을 때였다.
지난달 1일(현지시간) 미국 오리건주 세일럼 자택에서 만난 참전용사 빌 치즈홈(89) 씨는 "당시 장진호에 있던 미 1해병사단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우리 같은 보병 부대가 그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고 말했다.
트럭을 타고 육로로 7∼8시간쯤 지난 후 깜깜한 밤에서야 어딘지 모르는 곳에 도착했다.
그는 "장진호라는 사실은 도착 다음 날 알게 됐다"고 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 중심의 유엔군과 중공군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벌인 전투다.
한국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은 유엔군은 통일할 의도로 북한 지역으로 빠르게 진격해 나갔으나, 장진호에서 중공군을 맞닥뜨렸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고,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모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을 맞닥뜨리기 전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100년 만에 왔다는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날씨는 예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추위에 대비한 장비는 소용이 없었다.
공격에 대비해 엄호(구덩이)부터 파야 했지만, 땅이 꽁꽁 얼어붙어 그럴 수도 없었다.
눈치를 챈 것인지 중공군은 도착 3시간 만에 밀려들었다.
본격적인 전투였다.
미군은 M1 소총은 물론, 바주카포, 포탄이 1㎞ 이상 날아가는 무반동총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최전선에 있었던 치즈홈 씨는 "나는 몸 전체에 총알과 포탄을 두르고 있었다.
그 무게만 50㎏는 족히 됐다"고 했다.
당시 최신 장비를 동원한 공격에 수많은 중공군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중공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팔과 경적을 불어대며 끊임없이 내려왔다.
"저 멀리서 보이는 중공군은 마치 개미 같았다.
그들은 죽은 시체를 밟고 내려왔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도 되지 않았다.
"우리보다 10배, 15배는 되는 것 같았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됐다.
장진호에 도착하자마자 3박 4일간은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였다.
추위는 계속돼 죽은 중공군의 옷을 벗겨 껴입어야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혹독한 추위에 식량도 모두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캐러멜 사탕인) 투시롤(Tootsie Roll)만 먹고 7∼10일 가량"을 버텼다.
투시롤은 장진호 전투 당시 혹한에 얼어붙은 식량 대신 비상 보급 식량으로 활용됐던 것으로 유명하다.
적에게 포위됐던 미 해병대가 후방 보급부대에 박격포탄을 보내 달라는 통신을 보냈는데, 이를 접한 후방 부대에서 투시롤이 해병 대원들 사이에서 박격포탄을 일컫는 은어인 줄 모르고 진짜 투시롤 사탕을 공수해 투하한 데 따른 것이다.
치즈홈씨는 "전투 중 일본에 있던 지원 부대에 박격포를 보내 달라고 했다.
박격포의 코드명이 '투시 롤'이었다.
근데 그 부대에서 잘못 알아들어서 박격포가 아닌 진짜 투시 롤 수십통을 보내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먹은 투시 롤은 '생명줄'이었다.
그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지금도 재킷 호주머니에 투시 롤을 넣고 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까.
밀려드는 중공군 행렬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추위는 계속되면서 미군은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꽁꽁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너 깜깜한 밤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남하도 쉽지 않았고 하마터면 전멸될 뻔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포위망도 뚫어야 했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식별도 되지 않았다.
"장진호 남쪽에 해병대가 있었는데, 우리를 중공군으로 착각해 공격하려고 했다.
우리 쪽에서 신호를 보내 간신히 공격을 막았다"고 말했다.
미군의 상처도 컸다.
많은 병사가 전투로, 추위로 사망했다.
"당시 육군이 2천500명가량 됐는데, 절반 이상이 살아 돌아가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죽은 동료들을 트럭에 태워 흥남까지 내려왔다.
수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도 이때 피난을 했다.
이는 흥남 부두에서 10만명이 남한으로 피난한 철수로 이어졌다.
치즈홈씨는 "우린 결코 후퇴하지 않았다.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웃어 보였다.
이는 올리브 스미스 당시 미 1 해병사단장이 장진호 전투에서 철수하자 "후퇴인가요"라는 기자 질문에 말하면서 유명해진 어록이다.
/연합뉴스
힘겨운 철수, 美육군 절반 이상은 돌아오지 못해…"우리는 결코 후퇴하지 않았다" 1950년 11월 말 한국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7보병사단 31연대에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함경남도 장진시에 있는 장진호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2개월 전인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킨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맹 진군하고 있을 때였다.
지난달 1일(현지시간) 미국 오리건주 세일럼 자택에서 만난 참전용사 빌 치즈홈(89) 씨는 "당시 장진호에 있던 미 1해병사단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우리 같은 보병 부대가 그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고 말했다.
트럭을 타고 육로로 7∼8시간쯤 지난 후 깜깜한 밤에서야 어딘지 모르는 곳에 도착했다.
그는 "장진호라는 사실은 도착 다음 날 알게 됐다"고 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 중심의 유엔군과 중공군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벌인 전투다.
한국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은 유엔군은 통일할 의도로 북한 지역으로 빠르게 진격해 나갔으나, 장진호에서 중공군을 맞닥뜨렸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고,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모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을 맞닥뜨리기 전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100년 만에 왔다는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날씨는 예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추위에 대비한 장비는 소용이 없었다.
공격에 대비해 엄호(구덩이)부터 파야 했지만, 땅이 꽁꽁 얼어붙어 그럴 수도 없었다.
눈치를 챈 것인지 중공군은 도착 3시간 만에 밀려들었다.
본격적인 전투였다.
미군은 M1 소총은 물론, 바주카포, 포탄이 1㎞ 이상 날아가는 무반동총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최전선에 있었던 치즈홈 씨는 "나는 몸 전체에 총알과 포탄을 두르고 있었다.
그 무게만 50㎏는 족히 됐다"고 했다.
당시 최신 장비를 동원한 공격에 수많은 중공군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중공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팔과 경적을 불어대며 끊임없이 내려왔다.
"저 멀리서 보이는 중공군은 마치 개미 같았다.
그들은 죽은 시체를 밟고 내려왔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도 되지 않았다.
"우리보다 10배, 15배는 되는 것 같았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됐다.
장진호에 도착하자마자 3박 4일간은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였다.
추위는 계속돼 죽은 중공군의 옷을 벗겨 껴입어야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혹독한 추위에 식량도 모두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캐러멜 사탕인) 투시롤(Tootsie Roll)만 먹고 7∼10일 가량"을 버텼다.
투시롤은 장진호 전투 당시 혹한에 얼어붙은 식량 대신 비상 보급 식량으로 활용됐던 것으로 유명하다.
적에게 포위됐던 미 해병대가 후방 보급부대에 박격포탄을 보내 달라는 통신을 보냈는데, 이를 접한 후방 부대에서 투시롤이 해병 대원들 사이에서 박격포탄을 일컫는 은어인 줄 모르고 진짜 투시롤 사탕을 공수해 투하한 데 따른 것이다.
치즈홈씨는 "전투 중 일본에 있던 지원 부대에 박격포를 보내 달라고 했다.
박격포의 코드명이 '투시 롤'이었다.
근데 그 부대에서 잘못 알아들어서 박격포가 아닌 진짜 투시 롤 수십통을 보내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먹은 투시 롤은 '생명줄'이었다.
그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지금도 재킷 호주머니에 투시 롤을 넣고 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까.
밀려드는 중공군 행렬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추위는 계속되면서 미군은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꽁꽁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너 깜깜한 밤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남하도 쉽지 않았고 하마터면 전멸될 뻔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포위망도 뚫어야 했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식별도 되지 않았다.
"장진호 남쪽에 해병대가 있었는데, 우리를 중공군으로 착각해 공격하려고 했다.
우리 쪽에서 신호를 보내 간신히 공격을 막았다"고 말했다.
미군의 상처도 컸다.
많은 병사가 전투로, 추위로 사망했다.
"당시 육군이 2천500명가량 됐는데, 절반 이상이 살아 돌아가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죽은 동료들을 트럭에 태워 흥남까지 내려왔다.
수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도 이때 피난을 했다.
이는 흥남 부두에서 10만명이 남한으로 피난한 철수로 이어졌다.
치즈홈씨는 "우린 결코 후퇴하지 않았다.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웃어 보였다.
이는 올리브 스미스 당시 미 1 해병사단장이 장진호 전투에서 철수하자 "후퇴인가요"라는 기자 질문에 말하면서 유명해진 어록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