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도 무효…안도했던 기업들 다시 '초비상'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0가합575036
사건번호: 대구지방법원 2021가합205418

KB신용정보·대구경북능금농협, 연이어 1심 패소

연봉 확 깎거나 근로자 동의절차 엉성하면 무효
기업 승소 행진 끝 … 근로자 줄소송 나설 가능성
정년을 늘리는 대신 임금을 깎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라도 무효로 봐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업의 패소 사례가 없어 소송 전선에서 ‘무풍지대’로 여겨졌다. 하지만 임금 삭감 폭이 크거나 근로자 동의 절차에 문제가 있으면 임금피크제를 유효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판례가 나오면서 기업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향후 소송전에서 안심할 수 없게 됐다는 평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민사부(부장판사 정회일)는 지난 5월 KB신용정보 전·현직 근로자 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피크제 소송(사건번호:2020가합575036)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KB신용정보에 원고들이 임금피크제 적용 기간에 받지 못한 연봉과 퇴직금 미지급분 약 5억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KB신용정보는 2016년 2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직원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했다. 제도를 적용하는 나이는 만 55세로 정했다. 대상 직원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기 직전 연도 연봉보다 임금이 45~70%로 줄어든다. 일부 직원은 임금피크제 적용 첫해부터 연봉이 전년 대비 45% 수준으로 깎일 수 있는 것이다.

연봉 대폭 삭감하면 문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으면 아무리 성과를 많이 내도 임금피크제를 적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연봉을 더 받기 어렵다. 임금피크제가 없다면 KB신용정보 직원은 만 55세 이후 원래 정년인 58세까지 3년간 기존 연봉의 300%(3년치)를 받을 수 있었다. 임금피크제 도입 후엔 성과평가에서 매년 최고 등급을 받아야 이 수준의 연봉을 받는 게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마케팅직은 5년간 성과평가에서 최고 등급(S) 한 번 이상 또는 두 번째 등급(A+) 두 번 이상, 행정직은 5년 내내 S등급을 받아야 기존 연봉의 300%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이 기간 매년 최저 등급을 받는다면 기존 연봉의 225%(45%×5년)만 받는다. 재판부는 “근무기간이 2년 더 늘었음에도 임금 총액은 오히려 삭감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도 무효…안도했던 기업들 다시 '초비상'
그동안 법원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연령 차별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한국농어촌공사, 삼성화재, KT 등이 연이어 임금피크제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 같은 판결의 바탕엔 ‘정년연장 자체가 임금 삭감에 대한 보상’이란 판단이 깔려 있었다. 해당 기업들의 임금 삭감 폭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삼성화재는 정년을 만 55세에서 만 60세로 변경하면서 만 56세부터 4년에 걸쳐 연봉이 기존의 90%에서 60%로 차례로 줄어들도록 임금피크제를 설계했다. KT도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 적용 시점부터 정년까지 매년 10%포인트씩 임금이 감소하도록 만들었다.

"근로자 동의 제대로 받아야 유효"

근로자 임금이 늘었어도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본 판결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대구지방법원 제14민사부(부장판사 김정일)는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 퇴직근로자 5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2021가합205418)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조합에는 원고들이 임금피크제로 삭감된 임금 약 2억70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은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임금을 줄이는 내용의 임금피크제를 2016년 시행했다.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 직원은 만 57세에 임금이 기존의 70%로 감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만 58세 65%, 만 59세 60%, 만 60세 55%로 깎인다. 이 기간 받는 연봉 총액은 기존 연봉의 250%로 임금피크제가 도입되지 않았을 때 만 57세부터 정년(만 58세)까지 받는 금액(기존의 200%)보다는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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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임금피크제 도입 과정에서 근로자들의 동의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이 조합은 농협중앙회의 지도를 받고 노사협의회, 개별사업장별 설명회 등을 거쳐 2015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했다. 근로자 379명 중 265명의 동의를 받았다.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취업규칙을 변경하려면 근로자 과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근로자들 사이의 의견 교환’을 거쳐 찬반 의사를 취합하는 방식도 허용된다.

재판부는 “근로자들의 동의서 대부분이 조합이 공문을 발송한 다음날 제출됐다”며 “근로자들이 모여 토론이나 의견 교환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판단했다. “근로자들이 집단적 동의를 표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할 때 갖춰야 할 절차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근로자들이 개별적으로 종이 한 장에 서명하는 의사 취합 방식도 부적절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누가 동의하고 누가 동의하지 않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며 “상급자가 먼저 동의서에 서명하면 근로자들의 의견 교환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사협의회를 거쳤다”는 조합 측 주장도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들이 근로자들의 의사표시를 대리할 권리를 위임받은 것은 아니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혼란에 빠진 기업들

이번 판결로 임금피크제를 운영 중인 기업들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졌다는 평가다. 2022년 5월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연령 차별”이란 판결(2017다292343)을 내린 직후 산업계에는 큰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그 후 하급심에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연령 차별이 아니라는 판결이 잇따르면서 기업들이 안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고용노동부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원칙적으로 유효”라는 입장을 곧바로 내놓은 것도 기류 변화에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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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상황에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본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기업들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한국 기업의 87.3%가 정년연장형을 선택했다.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과정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이 많기 때문에 정년연장형 비율이 높다.

한 노동전문 변호사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가 무효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은 기업들의 희망에 그칠 수도 있다”며 “패소 사례와 비슷하게 임금피크제를 운영 중인 기업들이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