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들고 이직' 엔지니어 이어 '복제공장 설립' 시도 임원출신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내 대표적인 반도체 제조 전문가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통째로 복제한 공장을 중국에 세우려고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며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엔지니어가 핵심 기술이 담긴 자료를 들고 해외 회사로 이직하는 수준을 넘어 고위 임원과 협력사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기술 유출 사건이 잇따라 터지며 국가 기밀인 산업 기술 유출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도 넘은 반도체 기술 유출…'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 '임원 출신이 어떻게'…반도체 공장 복제설립 시도에 업계 '충격'
12일 업계와 검찰에 따르면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는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 BED(Basic Engineering Data)와 공정 배치도, 공장 설계도면 등을 빼돌린 A씨를 구속 기소했다.

A씨는 국내 반도체 업계 인력들에게 연봉 2배를 제안해 200여명을 본인 회사로 영입했고, 이들에게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설계도면 등을 입수해 '복제 공장' 설립에 활용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차세대 반도체 핵심공정을 개발한 국내 반도체 제조 분야 권위자로, 삼성전자 상무를 거쳐 하이닉스반도체(옛 SK하이닉스) 최고기술책임자(CTO) 부사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반도체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전문가인 A씨가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에 업계는 충격에 빠진 분위기다.

도 넘은 반도체 기술 유출…'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 반복되는 첨단산업 기술유출…처벌은 '솜방망이'
문제는 반도체 업계의 기술 유출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지난달 핵심 기술이 포함된 중요 자료 수십 건을 외부 개인 메일로 발송하는 식으로 자료를 유출한 엔지니어를 적발해 해고 조치하고 국가기관에 수사를 의뢰했다.

작년에는 다른 업체로 이직을 준비하던 엔지니어 2명이 각각 모니터 화면에 국가 핵심 기술이 포함된 중요 자료를 띄워놓고 이를 사진 촬영해 보관하다 잇따라 적발됐다.

올해 초에는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 전 연구원 등 7명이 세메스의 영업 기밀을 이용해 반도체 습식 세정장비를 만들어 수출했다가 적발돼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기밀 유출 우려가 커지자 아예 자체적으로 지식 검색과 번역, 요약, 회의록 정리 등의 기능을 갖춘 맞춤형 AI 서비스를 연내에 도입하기로 했다.

도 넘은 반도체 기술 유출…'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에서 기술 유출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중국 등은 거액의 연봉 등으로 회유하며 인재 영입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반도체·전기전자·조선·디스플레이 등 산업기술의 해외유출 적발 건수는 총 142건에 달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기업 예상 매출액, 연구개발비 등을 기초로 추산된 피해 규모는 약 26조원에 이르렀다.

이처럼 기술 유출 범죄가 기업 생존과 국가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지만, 어렵게 기술유출 범죄를 잡더라도 대부분 초범이거나 피해 정도를 산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총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총 87.8%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반면 실형과 재산형(벌금 등)은 각각 2건(6.1%)에 그쳤다.

국가핵심기술 해외유출에 대한 법정형은 '3년 이상 유기징역'이지만, 실제 법원의 기본 양형 기준은 '1년∼3년 6월'에 그치고 있다.

도 넘은 반도체 기술 유출…'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 "기술유출 범죄 양형기준 높여야"…尹대통령 "창의·혁신 성과물 보호"
이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반도체, 이차전지, 자율주행차 등 주력 산업을 중심으로 기술 해외 유출이 지속해 발생하고 있다"며 기술 유출 범죄의 양형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앞서 대검찰청도 산업스파이와 같은 기술유출범죄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을 대법원 양형위에 제출한 바 있다.

실제로 대만은 지난해 국가안전법 개정을 통해 군사·정치 영역을 넘어 경제·산업 분야 기술 유출도 간첩 행위에 포함했으며, 미국은 연방 양형기준을 통해 피해액에 따라 범죄 등급을 조정해 형량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주요국은 처벌을 강화하는 추세다.

전경련은 "기술 유출 범죄는 범행 동기와 피해 규모 등이 일반 빈곤형 절도와 다르기 때문에 초범에 대한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며 현행 양형기준상 감경 요소의 재검토 필요성을 지적했다.

도 넘은 반도체 기술 유출…'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기술 유출 범죄의 심각성이 제기되며 국정원과 대검찰청, 경찰, 특허청 등 범정부 차원에서 관련 제도 개선 방안 논의도 잇따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2일 열린 발명의날 축사에서 "정부는 기술 유출과 같은 침해행위에 대해 강력한 법 집행으로 창의와 혁신의 성과물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최근 열린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도 "반도체 경쟁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산업전쟁이며 국가총력전"이라며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헤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검 과학수사부는 국가 핵심기술을 국외로 유출하는 범죄에 대해 구속 수사하는 등 엄정 대처하는 내용의 '검찰사건처리기준 개정안'을 전국 일선 검찰청에 전달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8일 중소기업 기술침해 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피해 금액의 3배에서 5배로 강화하고, 기술침해 분쟁 발생 시 정부가 원스톱으로 지원하는 '범부처 기술보호 게이트웨이'를 구축하는 내용의 '중소기업 기술보호 지원 강화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인력 유출을 막는 일이 국가 안보 측면에서도 중요해지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계는 장기간 경험을 축적한 우수 엔지니어가 정년 이후에도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등 인력 유출에 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