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과 진심으로 만드는 맛있는 인생이란 레시피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장준우의 씨네마 브런치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
음식에 진심을 담아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뒤늦게 요리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된 날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기왕 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또 진심을 담아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의 발로였다. 진정성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진짜와 가짜를 점점 더 구별하기 어려워진 요즘 ‘진심’은 ‘최선’이나 ‘정성’처럼 그저 낯 뜨거운 단어로 전락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가 있다.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 마냥 집과 작은 가게를 오가며 도라야키(단팥빵)를 잠자코 구워낸다. 마치 무언가에 대해 속죄하듯 낮엔 도라야키를 굽고, 밤에는 술독에 빠진다. 시지프스처럼 매일을 무미건조하게 지내던 그에게 어떤 노인이 다가온다. 칠순이 넘은 노인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하지만 남자는 귀찮은 듯 도라야키 한 봉지를 쥐어주며 성치 않은 그를 돌려보낸다. 며칠 후 다시 찾아온 노인은 빵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팥앙금이 아쉽다며 본인이 만든 팥앙금을 주고 떠난다. 남자는 노인이 준 팥앙금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꺼내 맛을 본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남자가 노인을 고용하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알고 보니 50년이 넘게 팥앙금을 만들어온 이력을 가진 노인은 남자가 업소용 팥앙금을 쓰는 걸 보고는 그래선 안된다며 안타까워한다. 둘은 새벽부터 일어나 불린 팥을 삶고 앙금을 손수 만든다. 팥에 말을 걸고 팥을 멀리서 온 손님이니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는 노인의 말을 들은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지만 작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다. 노인과 함께 완성한 팥앙금을 빵에 끼워 넣고 맛을 본 남자는 도라야키를 하나 다 먹은 건 처음이라며 원래 단 걸 싫어하고 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노인은 그럼 술집을 하지 왜 도라야키를 만드냐고 묻지만 남자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작은 도라야키 가게에서 도라야키를 팔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삶의 두 대척점을 상징한다. 무언가 열심히 하지만 진심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상황일지라도 세상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불의의 사고로 큰 빚을 지고는 절망에 빠져 어쩔 수 없이 도라야키를 만들어 파는 남자와 한평생 강제로 격리된 절망적인 삶을 살았지만 인생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깨닫고 모든 것에 경의에 찬 애정을 보이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 진심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마치 인생과도 같아서 힘이 많이 드는 수고스러운 일이다. 힘이 드는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성이 들어갔다고는 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저 해야 할 일이니 하는 사람도 있다. 무릇 정성이란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흔히 요리사의 세계에서 식재료를 존중해야 한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식재료가 비싸니 아껴 다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하찮은 식재료라도 그것이 자라고 수확되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노고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존중한다는 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번이라도 자기 손으로 식재료를 키워보았거나 수확하는 장면이라도 현장에서 보게 된다면 결코 허투루 낭비할 수 없어진다. 굳이 키우거나 수확 현장을 목격하지 않더라도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존중하는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노인이 팥을 손님이라 부르고 팥이 자라 이곳으로 오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한다는 대목이 이와 통한다.
식재료를 존중하면 정성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존중에서 비롯된 정성은 진심이 담기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존중하면 정성을 다하게 되고, 정성을 다하면 진심이 담긴다. 남자는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절망에 허우적거리며 스스로를 전혀 존중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고 아끼지 못하니 진심을 담아내지 못하고, 진심이 부재하다 보니 스스로 존중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영화 말미에 노인은 남자를 향해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듣기 위해 태어났기에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라고. 악순환하는 시지프스의 바위를 던져버릴 수 있는 힘,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힘의 단초는 결국 스스로는 존중하는 마음에 있음을 안 남자는 그제야 도라야키 만드는 일을 진심으로 대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음식에 진심을 담는다는 건 어떤 의미며, 진심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음식이든 인생이든 정성을 다하고 진심을 담아낼 수 있다. 누가 알아보고 알아보지 못하는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심이 담긴 음식은(인생은) 정말로 맛있을까. 팥의 작은 흠집조차 골라낼 정도로의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신경 쓴 음식이라면 맛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그토록 맛에 집착하는 태도의 저변 한편엔 누군가 정성을 다해 진심이 담긴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정서적 허기짐이 도사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50년이 넘게 팥앙금을 만들어온 이력을 가진 노인은 남자가 업소용 팥앙금을 쓰는 걸 보고는 그래선 안된다며 안타까워한다. 둘은 새벽부터 일어나 불린 팥을 삶고 앙금을 손수 만든다. 팥에 말을 걸고 팥을 멀리서 온 손님이니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는 노인의 말을 들은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지만 작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다. 노인과 함께 완성한 팥앙금을 빵에 끼워 넣고 맛을 본 남자는 도라야키를 하나 다 먹은 건 처음이라며 원래 단 걸 싫어하고 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노인은 그럼 술집을 하지 왜 도라야키를 만드냐고 묻지만 남자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작은 도라야키 가게에서 도라야키를 팔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삶의 두 대척점을 상징한다. 무언가 열심히 하지만 진심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상황일지라도 세상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불의의 사고로 큰 빚을 지고는 절망에 빠져 어쩔 수 없이 도라야키를 만들어 파는 남자와 한평생 강제로 격리된 절망적인 삶을 살았지만 인생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깨닫고 모든 것에 경의에 찬 애정을 보이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 진심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마치 인생과도 같아서 힘이 많이 드는 수고스러운 일이다. 힘이 드는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성이 들어갔다고는 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저 해야 할 일이니 하는 사람도 있다. 무릇 정성이란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흔히 요리사의 세계에서 식재료를 존중해야 한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식재료가 비싸니 아껴 다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하찮은 식재료라도 그것이 자라고 수확되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노고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존중한다는 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번이라도 자기 손으로 식재료를 키워보았거나 수확하는 장면이라도 현장에서 보게 된다면 결코 허투루 낭비할 수 없어진다. 굳이 키우거나 수확 현장을 목격하지 않더라도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존중하는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노인이 팥을 손님이라 부르고 팥이 자라 이곳으로 오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한다는 대목이 이와 통한다.
식재료를 존중하면 정성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존중에서 비롯된 정성은 진심이 담기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존중하면 정성을 다하게 되고, 정성을 다하면 진심이 담긴다. 남자는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절망에 허우적거리며 스스로를 전혀 존중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고 아끼지 못하니 진심을 담아내지 못하고, 진심이 부재하다 보니 스스로 존중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영화 말미에 노인은 남자를 향해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듣기 위해 태어났기에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라고. 악순환하는 시지프스의 바위를 던져버릴 수 있는 힘,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힘의 단초는 결국 스스로는 존중하는 마음에 있음을 안 남자는 그제야 도라야키 만드는 일을 진심으로 대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음식에 진심을 담는다는 건 어떤 의미며, 진심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음식이든 인생이든 정성을 다하고 진심을 담아낼 수 있다. 누가 알아보고 알아보지 못하는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심이 담긴 음식은(인생은) 정말로 맛있을까. 팥의 작은 흠집조차 골라낼 정도로의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신경 쓴 음식이라면 맛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그토록 맛에 집착하는 태도의 저변 한편엔 누군가 정성을 다해 진심이 담긴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정서적 허기짐이 도사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