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순국지 등 사적지 26곳 있지만 표지판은 하나도 없어
교민들, 모임 구성해 역사 기록…3·1 운동 기념 사진전 개최
'항일투쟁의 요람' 베이징서 사라져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중국 수도 베이징은 일제 침략기 상하이, 만주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 지역이었다.

임시정부의 주류인 상하이 독립투사들이 외교를 통한 독립 노선을 강조했다면 베이징의 독립투사들은 우리의 힘으로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며 무장 투쟁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베이징의 독립투사들은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등 다양한 노선과 이념을 추구하면서 역사의 주류가 아닌데다 규모나 영향력이 작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무장투쟁 주장한 베이징 독립투사들
우당 이회영, 심산 김창숙, 단재 신채호 선생은 베이징 독립운동을 이끈 '북경 3걸'로 통한다.

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홈페이지에 기록된 베이징 사적지는 모두 26곳으로, 상하이(27곳)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적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이 설치된 곳은 한 곳도 없다.

빠르게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는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특성상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만큼 관리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광야'와 '청포도'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육사 순국지는 그나마 흔적이 남아 있어 하루빨리 관리에 나서야 하는 지역이다.

'항일투쟁의 요람' 베이징서 사라져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국외독립운동사적지 베이징 편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이육사 순국지는 베이징의 명동으로 불리는 왕푸징(王府井)에서 1.5㎞ 떨어진 둥창후퉁(東廠胡同) 28호에 있다.

일본은 이곳에 문화특무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를 설치한 뒤 고서 수집·번역, 유물·유적 조사, 인물 회유·포섭 등 공작을 진행했다.

이육사는 국내 무기 반입 등을 이유로 1943년 가을 경성에서 체포된 뒤 베이징으로 압송돼 이듬해 이곳 지하 감옥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둥창후통 28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사유지인데다 완벽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다.

특히 지난해까지만 해도 건물 내부에 들어가 지하 감옥으로 사용된 시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최근 리모델링과 함께 입구에 안면인식 잠금장치를 설치해 주민이 아니면 접근조차 못 하게 됐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6명의 형제와 일가족 재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을 시작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 이회영 선생도 베이징에서 6년여 동안 6곳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이회영 선생은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집은 '베이징의 임시정부'로 불렸다.

현재 이회영 선생이 젊은이들과 대한독립을 논의하던 장소들은 대부분 재개발과 함께 마천루로 변했다.

신채호 선생도 베이징에서 13년간 살며 한·중이 공동으로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그의 흔적은 역사서 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 독립운동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베이징 독립투사들에 대한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 때 기록으로 남겨 이곳이 독립운동과 관계된 장소라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전하겠다는 의지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교민, 주재원, 학생들로 구성된 '재중 항일역사기념사업회'가 그 주인공이다.

'항일투쟁의 요람' 베이징서 사라져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이 단체 회원들은 매주 한자리에 모여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의 소중함을 알려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어로 출판된 각종 서적과 국내 전문가가 쓴 논문을 비교하며 발품을 팔거나 베이징의 옛 지도를 놓고 당시의 지명과 독립투사의 활동을 기록한 문건 속 지명을 비교하며 현재의 위치를 추정해보기도 한다.

매년 1월 이육사 선생 서거일이 되면 동창후통 28호를 찾아가 조촐한 제사상을 올리는 것도 이들의 중요한 일정이다.

재중 항일역사기념사업회가 3·1운동 104주년을 맞아 1일 베이징 한국인 밀집 지역 왕징에서 독립운동의 소중함을 알리는 사진전을 열었다.

이회영·김창숙·신채호 선생은 물론 남형우·박용만·원세훈·서왈보·신숙·정현섭·이윤재·김원봉·류자명 등 베이징에서 활동한 독립투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아울러 베이징은 물론 톈진, 허베이, 랴오닝, 지린 등 회원들이 중국 전역을 돌며 직접 찍은 독립운동 사적지의 현재 모습도 함께 전시했다.

아마추어가 휴대전화로 찍어 구도나 색감 등이 어색하지만, 독립운동 사적지 관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자료들이다.

'항일투쟁의 요람' 베이징서 사라져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홍성림 기념사업회장은 "독립투사들이 삶과 혼이 담긴 사적지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이것을 교민들과 공유하자는 생각에 사진전을 개최하게 됐다"며 "3·1 운동의 소중함과 독립투사의 고된 삶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베이징은 상하이·충칭·만주 등과 함께 많은 독립투사가 활동한 곳이지만, 정책적 배려가 부족해 표지판 하나 설치된 곳이 없다"며 "우리 정부가 중국과 협의해 독립운동 사적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라도 설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