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정신과 의사가 기록한 대지진의 상처들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1995년 1월 17일 동트기 전 새벽녘. 쿵 소리와 함께 집이 흔들렸다.

흔들림은 오래 지속됐다.

책장이 쓰러지고, 서랍이 전부 나와 있었다.

주방에는 선반에서 떨어진 그릇들이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전철이 마비됐다는 소식에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갈라진 땅바닥에 자판기가 쓰러져 있고, 낡은 건물의 벽이 무너져 있었다.

출근길에 보니 집 피해는 가벼운 수준이었다.

익숙한 건물이 무너져 도로를 막고 있었고, 골목에는 목조 주택이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건물에서 나온 흙먼지와 가스 새는 냄새가 온 동네를 떠다녔다.

구급차와 소방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정신과 의사 안 가쓰마사(安克昌)가 경험한 한신대지진(고베대지진)의 첫날 풍경이다.

한신대지진은 1995년 1월 17일 효고(兵庫)현 고베시를 비롯해 아와지시마(淡路島), 오사카(大阪) 등지에서 발생한 규모 7.3의 대지진이었다.

6천434명이 죽고, 4만3천여 명이 다쳤으며 20여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형 참사였다.

재일교포 3세인 안 가쓰마사가 쓴 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휴머니스트)은 그런 대지진을 견디고 버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등뼈를 드러낸 건물과 철사처럼 휜 철도를 바라보듯, 저자는 휘어지고 갈라진 피해자들의 마음속 상처를 바라보며 치유하려 노력한다.

책은 그 분투의 기록이다.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책에 따르면 대지진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생존자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등 공공시설에 마련된 '대피소'에 모였다.

그 수만 30여 만에 달했다.

그들 중 다수가 불면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감기에 걸려 누워 있는 노인도 많았고, 만성질환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스와 수도가 모두 끊겨 씻는 것도 어려웠다.

종이상자나 의자 등으로 만든 칸막이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사생활은 쉽게 노출됐다.

저자가 본 대피소는 "난민 캠프"를 방불케 하는 가혹한 공간이었다.

"건물과 고속도로가 처참하게 무너진 모습이야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고통은 결코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다.

"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피해자들은 재난 조증, 정신질환 재발과 악화, 심적 외상을 겪었다.

중년 여성 A씨는 대지진으로 집과 일하던 찻집이 모두 붕괴했다.

삶의 기반이 무너져내리면서 몇 년간 안정됐던 조울증이 되살아났다.

그의 말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말이 엄청나게 빠른데다가 한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새로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중년 남성 B씨는 장을 보겠다며 온 동네를 쏘다녔다.

여진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작은 일에도 죽을 듯이 달려들었다.

불안 속에서 흥분이 높아져 "몸과 마음이 이른바 풀 가동된 상태"였던 것이다.

C씨는 여진에 대한 공포 탓에 음식도 삼키지 못하고, 잠도 들지 못했다.

D씨는 복도에서 자다가 용변 실수를 했고, E씨는 피해망상에 빠졌으며 치매를 앓던 F씨의 상태는 악화했다.

이처럼 대지진과 같은 파국적 체험은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 한다.

PTSD의 가장 큰 특징은 외상 사건에 관한 기억이 여러 형태로 의식에 침투해 온다는 것이다.

이는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갑자기 플래시백 상태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PTSD가 길어지면 알코올의존증이 되기도 하고 우울 상태가 지속되기도 한다.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지진 피해자들만 힘들었던 건 아니다.

지진이 뒤흔들고 간 자리에는 '없는 것'투성이였기에 구호에 나선 이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매몰된 사람을 살릴 인력도, 도구도 없었다.

화재 진압을 위한 물도 없었다.

부상자를 옮길 수단도 없었다.

병원에서 검사도, 수술도 할 수 없었고, 병상도 없었다.

그런 폐허 속에서 자원봉사자나 의료진 등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재난 직후 자신들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확인하려는 피해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에 쫓겨 자신을 혹사하고 소진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이유였다.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책은 재난 현장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는 피해자와 구호자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건물 잔해에서 건져 올린 개개인의 마음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따뜻하다.

때로는 한숨을, 때로는 눈물을 짓는 저자의 걱정이 글 속에 배어있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최근 대지진 참사가 빚어진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한참 생각하게 한다.

39세에 암으로 세상을 뜬 저자의 마지막 저서이자 1996년 산토리학예상 수상작이다.

박소영 옮김. 320쪽.
대지진이 몰고 온 트라우마…신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