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선 '자사주 매입 즉시 소각'…국내는 경영권 방어·지배력 확대 수단

자사주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기업가치가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자사주 매입이 곧 소각으로 이어지는 외국 관행과 달리 국내에서 자사주는 기업의 경영권 방어나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이용돼 주주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주주 친화 정책과 거리가 먼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 활용 방식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유발하는 요인 중 하나라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경영계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준하는 정도로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하는 작업이 선결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 "자사주 보유량 많을수록 기업가치에 부정적"
"자사주 소각 않은 채 보유 비중 클수록 기업가치 낮아"
12일 한국증권학회지 최근호에 실린 김우진 서울대·임지은 한성대 교수의 '자사주 보유가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 따르면 자사주 보유가 많은 그룹은 자사주 보유가 적은 그룹에 비해 기업가치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진은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제조회사 1천860개사의 발행 주식 총수 대비 자기주식 보유 비중을 분석해 중앙값(2.4%)을 산출하고, 이를 기준으로 보유량이 많은 기업과 보유량이 적은 기업으로 그룹을 나눠 기업가치를 비교했다.

그 결과 자사주 보유가 상대적으로 많은 그룹은 자사주 보유가 적은 그룹에 비해 기업가치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토빈의 Q'(주식시장에서 평가된 기업의 시장가치를 기업의 자산가치로 나눈 비율)로 측정한 기업가치는 자사주 보유가 많은 그룹이 적은 그룹보다 약 24%포인트 낮았으며, 시장-장부가비율(보통주의 주당 장부가격에 대한 시장가격의 비율)은 약 43%포인트 낮았다.

연구진은 이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사주를 지속적으로 평균보다 많은 양을 보유하는 것은 기업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사주 관련 활동이 있거나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자사주의 매입, 처분, 소각 등 현황을 살펴본 결과, 37.44%가 자사주 매입을 진행했고 처분을 한 기업은 24.73%로 집계됐다.

자사주를 소각한 기업은 단 2.44%뿐이었다.

기업들이 자체 공시한 자사주 매입 목적은 '주가 안정과 주주가치 제고'라는 내용이 55.55%로 가장 높았으나 실제 소각은 2% 내외로 일어난 것이다.

저자들은 "공시된 자사주 매입 목적이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장기적으로 자사주를 소각하는 것이 기업가치에 긍정적임에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있다"고 짚었다.

◇ 미국은 '자사주 매입 즉시 소각' 관행…시총에서도 제외
"자사주 소각 않은 채 보유 비중 클수록 기업가치 낮아"
해외에서는 자사주 매입은 곧 소각이라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다.

자사주 매입(소각)은 기업이 배당과 함께 주주환원 정책 일환으로 사용하는 카드 중 하나다.

페이스북 모기업 메타플랫폼(메타)은 이달 초 시장 예상치를 웃도는 실적을 발표하면서 주가 부양을 위해 400억달러(약 5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공개했다.

메타 주가는 하루 만에 20% 가까이 폭등했다.

반면 국내에서 자사주는 기업들이 매입 뒤 소각하지 않고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잦다.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어하기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고, 경영권 위협이 들어오면 우호 세력에게 매각해 '백기사'를 확보하기도 한다.

삼성물산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의 지분 경쟁에서 KCC에 자사주를 매각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자사주는 기업이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으로 불리는 현상으로, 인적분할 뒤 존속법인(지주회사)의 자사주에 신설법인의 신주를 배정해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

자사주엔 의결권이 없지만 자사주 지분만큼 배정받은 신주는 의결권이 생겨 소액주주의 의결권 비중을 줄어들게 하는 데다가, 대주주가 보유하게 된 신설법인의 지분을 지주회사가 현물로 받고 그 대가로 신주를 발행해 대주주에 넘겨주는 현물출자 유상증자를 진행하면 대주주의 지주사 지분율을 높일 수도 있다.

다만 최근엔 주주환원 요구가 거세지면서 이 같은 관행에도 제동이 걸리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지난 10일 현대백화점그룹이 자사주를 활용한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전문가들은 주주환원 정책과 동떨어진 국내 기업들만의 자사주 활용 방식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사주를 매입해서 다른 목적으로 쓰는 것은 외국 관행과 비교하면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한국 증시 저평가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우진 교수 등은 "자사주가 매입 즉시 시가총액에서 제외되지 않는 현재의 국내 관행상 자사주 매입이 주주환원 정책의 일환으로 시장에서 평가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매입에 그치지 않고 최종적으로 소각까지 이뤄져야 한다"며 "미국과 유사하게 매입 즉시 시가총액에서 제외하는 방향으로의 제도 개선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반면 경영계에서는 자사주를 활용할 수 없다면 해외와 유사한 수준으로 경영권 방어 수단을 대안으로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경영권 방어·승계 수단이 자사주밖에 없기 때문에 더 중요한 측면이 있다"며 "차등의결권,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 필)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경영권 방어 수단 도입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은 상속증여세율 조정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