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 한 컷 3만 시간 찍은 애니…느리지만 따뜻한 스톱모션이 왔다
요즘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입체감을 불어넣는 3차원(3D) 방식을 쓴다. 디즈니 만화영화 ‘겨울왕국’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장면이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장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2차원 화면에 실감 나는 영상을 구현해주는 3D 기술은 장점이 하나 더 있다. 제작 기간이 단축되는 것이다. 제작자들이 3D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배경이다.

3D 애니메이션의 공고한 아성에 도전장을 내미는 작품이 나온다. 오는 25일 개봉하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이다. 이 작품은 각 장면과 소품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제작한 뒤 사진을 찍어 이어 붙이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 방식을 사용했다. 제작 기간만 2만8440시간, 3년 3개월에 달한다. 한국 시장에선 ‘흥부와 놀부’(1967) ‘콩쥐 팥쥐’(1977) 이후 46년 만에 나오는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작품을 연출한 제작사 스튜디오요나의 박재범 감독은 10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간담회를 열고 “지금은 3D 기술이 엄청 발전해 있지만 사람 자체는 아날로그”라며 “스톱모션도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사람 자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 제작에 나섰다”고 말했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나온 스톱모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인형 등 정지된 상태의 물체에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1프레임씩 사진을 찍는다. 이후 촬영한 것을 연속적으로 넘겨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종이 만화 그리기’를 떠올리면 된다. 노트의 각 장에 그림을 그리고 조금씩 변화를 준 다음 빠르게 넘기면, 마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스톱모션은 각 캐릭터를 비롯해 소품 하나하나를 수작업으로 하기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고 따뜻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런 이유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발달한 해외에선 꾸준히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도 스톱모션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 영화 부문 글로벌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혜로운 방구석 생활’ ‘빅 피쉬’ 등 단편 스톱모션만 선보였던 박 감독은 용기를 내 과감히 규모를 확장하고 처음 장편에 도전했다. 참여 스태프만 36명, 한땀 한땀 만들어 생명력을 불어넣은 인형 수만 22개다. 박 감독은 “한국에서 개봉한다는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라며 “관객 한 분이라도 더 한국에서도 이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툰드라에 온 듯 생생한 배경 구현

작품은 설원의 소녀 그리샤가 전설의 붉은 곰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눈과 얼음의 땅에서 순록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샤는 원인 모를 병에 걸린 엄마를 살리려 한다. 이를 위해 북극성을 따라서 땅의 끝에 다다른 그리샤 앞에 마침내 붉은 곰이 나타나고, 곰은 그리샤가 선택받은 존재임을 알려준다.

엄마의 땅에선 무엇보다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의 힘이 크다. 사랑스러운 그리샤, 그리샤의 곁을 지키는 영리하고 귀여운 순록 세로데토가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인다. 신비로운 붉은 곰은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품은 캐릭터로 끝까지 작품의 몰입도를 높인다.

‘엄마의 땅’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배경 연출에 약하다는 편견도 깨부순다. 이 작품은 SBS 다큐멘터리 ‘최후의 툰드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해 시베리아 툰드라를 배경으로 한다. 박 감독은 새하얀 설원, 그 위를 달리는 수천 마리의 순록 떼, 황홀한 오로라를 아름답고도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그는 “불, 바람, 오로라 모두 스톱모션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최후의 툰드라’를 연출한 장경수 PD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등을 스톱모션으로 구현한 작품을 보니 영하 50도의 툰드라 한복판에 와 있는 느낌”이라며 “그리샤의 모험은 대자연과 사람이 교감하는 감동적인 여정 그 자체”라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