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이태원 참사 추모 'G선상의 아리아'로 시작…관객들 박수 없이 묵념
품격과 우아함의 극치 들려주며 가장 빈필다운 연주 선사
"빈 왈츠는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 아닙니다.

왈츠에는 빈의 영혼이 담겨 있지요.

오늘 저녁 빈의 영혼을 여러분께 선물로 전해드립니다.

"
마에스트로 프란츠 벨저뫼스트는 이런 인사말을 전한 뒤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방울새 왈츠'(Op.114)를 연주했다.

이 왈츠는 화려하고 흥겨운 춤곡이라기보다 빈의 숲속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요, 거기 귀 기울일 줄 아는 유연하고도 넉넉한 사람의 마음을 그려 놓은 더없이 우아한 작품이었다.

그렇게 마에스트로 벨저뫼스트와 빈필은 오스트리아의 진면목을 우리 관객들에게 알려줬다.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양국의 우호와 친선을 확인하고 발전적 관계를 모색하는 자리에 더없이 걸맞은 앙코르였다.

지난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 지휘를 맡은 프란츠 벨저뫼스트는 2010년 이래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서 2011년, 2013년에 이어 내년 빈 신년 음악회를 지휘하게 될 오스트리아 지휘계의 최고 대가다.

이날 공연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로 시작됐다.

빈필은 추념의 뜻을 담아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중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했고, 연주자와 관객 모두 연주 후에 박수 없이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잠깐이지만 상실을 위로하는 음악의 힘과 가치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후 공연은 바그너의 '파르치팔' 전주곡으로 시작됐다.

숙연한 분위기 가운데 바그너의 구원 오페라인 '파르치팔'이 연주되며 침묵과 추모의 정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벨저뫼스트가 이끄는 빈필은 속죄와 화해, 용서를 그리는 이 악극의 인상을 더없이 깊은 침잠, 곧 모든 것이 융해된 것 같은 신비로운 음향을 들려줬다.

14분 남짓한 이 작품을 뒤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변용'이 이어졌다.

마에스트로 벨저뫼스트는 지휘봉을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다음 곡의 연주를 이어갔다.

그 시작과 끝을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빈필의 연주는 매끄러웠다.

바그너와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같은 말을 하는 하나의 음악인 것처럼 말이다.

묘한 긴장감과 일체감이 흘렀는데 이는 또한 1부 시작부의 추모의 침묵과 맞닿아 있었다.

바흐와 침묵, 침묵과 바그너, 침묵과 슈트라우스. 이렇게 고요 가운데 관객들은 음악의 깊이 안으로 빠져들어 갈 수 있었다.

'죽음과 변용'은 아직 젊었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훗날 찾아올 죽음의 모습과 이후의 변용된 삶을 상상적으로 그려낸 교향시다.

본래 두렵고 위협적인 '운명의 모티프'와 승화와 열락을 말해주는 '변용의 모티프'가 대비를 이루는 작품이지만, 이 곡이 앞의 '파르치팔' 전주곡과 하나로 이어지면서 관객들은 기묘한 음향적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신비의 음향(바그너) 속에 침잠해 있다가 삶과 죽음의 서사(슈트라우스)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관현악이 입체감을 얻더니 운명의 모티브가 등장할 때 엄청난 음향적 증폭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빈필은 시종 여유와 유연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사운드를 선명하게 들려줬다.

억지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끌어내려는 과장이 없었고 단원 개개인의 탁월한 음악성 덕분에 미세한 음표 하나하나까지 입체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됐다.

특히 빈필의 악장 알베나 다나일로바가 이끈 현악 파트의 질감, 민감성, 반응속도, 응집력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음표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실리는 명암과 뉘앙스, 제스처 등이 다 '뜻 있는' 소리였다.

한국의 오케스트라가 더 배우고 발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연주였다.

2부에는 드보르자크의 명작 교향곡 8번이 연주됐다.

빈필의 드보르자크는 슬라브적인 호방함이나 민속적인 활달함보다는 이 작품 본연의 정교함과 예술성을 드러내는 명연이었다.

드보르자크의 교향곡은 친구 브람스를 매료할 만큼 더없이 우아하고 세련된 음악적 세공품이었다.

다채로운 색채, 여러 가닥으로 어우러지는 생동감 있는 리듬은 시종일관 따뜻하고도 선명하게 전해졌다.

1, 2악장에서의 목관과 바이올린 사이의 앙상블, 그리고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3악장 알레그레토 그라치오소의 생명력 넘치는 유기적 현악은 그야말로 빈필 다운 최고의 연주였다.

드보르자크의 토속적 색채나 드라마틱한 효과를 기대한 관객들은 어쩌면 다소 심심하다고 여겼을지 모르겠으나 연주의 수준은 말 그대로 최상이었다.

오케스트라 전체의 음향 밸런스와 개별 솔로 파트의 선명성 등은 어째서 빈필이 빈필인지를 증명해 주기에 충분했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위로하는 힘. 그 두 가지가 만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