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눈감지 마라' 출간…"르포 쓰는 심정으로 썼죠"
이기호 작가 "수도권과 지방 격차가 권위의 서열화로 치달아"
지역 불균형 심화, 지방대 고사 위기란 말이 굳어진 지 오래다.

'지방'과 '청년'은 선거철마다 후보들 공약의 단골 키워드이지만, 공언무시(空言無施·빈말만 하고 실천이 따르진 않는다는 뜻) 되기 일쑤다.

중견 소설가 이기호(50)가 최근 펴낸 연작 짧은 소설 '눈감지 마라'(마음산책)는 두 지방 청년의 고된 현실을 판화처럼 찍어냈다.

작가는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라 2008년부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연합뉴스와 전화로 만난 그는 "지금 청년들에게 지방 출신이란 건 저희 세대 때와 좀 다른 것 같다"며 "과거엔 하나의 정체성일 뿐이었는데, 이젠 수도권과 지방의 서열화가 굉장히 강건해져 일종의 권위의 서열화까지 육박한 것 같다"고 짚었다.

"이런 서열화가 지방 청년들을 서울로 이동하도록 하고, 그렇지 못하면 추락하거나 뒤처진 인생이란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
'눈감지 마라'는 작가가 2017년 1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일간지에 연재한 소설 49꼭지를 추려 묶었다.

당초 칼럼 요청을 받았던 그는 칼럼의 '훈계조'가 싫어 제자들의 고단한 삶을 유쾌하게 그린 짧은 소설을 써보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팍팍해진 이들의 삶을 접하고는 단순한 농담으로 다룰 이야기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쓰다 보니 가벼운 터치 또한 폭력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중간쯤엔 르포를 쓰는 심정으로, 취재한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청년들 문제는 보편적으로 다룰 수 없지만, 제가 만든 두 청년의 이야기는 정직하고 똑바로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기호 작가 "수도권과 지방 격차가 권위의 서열화로 치달아"
소설 속 정용과 진만은 지방사립대를 나왔다.

광역시 같은 지방 대도시가 아니라 주위에 논과 밭, 산밖에 없는 '산골짜기' 대학이다.

둘은 졸업한 뒤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 원짜리 반지하 원룸에 함께 살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출장 뷔페부터 택배 상하차, 편의점, 생활폐기물 업체, 치킨집 배달까지 닥치는 대로 한다.

서로 의지하던 둘을 갈라놓는 것도 '없는 현실'이다.

정용은 집주인이 요청한 보증금을 보탤 여력이 없는 진만에게 점차 마음이 뾰족해지고 결국 사소한 일로 이런 말을 내뱉는다.

"무슨 거지새끼도 아니고."
이 작가는 "위로하고 연대하던 영역 안에서도 서열이 나뉘고 을과 을의 싸움이 일어난다"며 "'나도 쟤처럼 되면 어떡하지'란 두려움 때문에 혐오하고 차별 짓기를 한다.

정용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을 후회하지만, 주눅이 들었던 진만에겐 그런 말도 폭력으로 다가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호 작가 "수도권과 지방 격차가 권위의 서열화로 치달아"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두 청년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소설 속 청년들의 자조 섞인 대사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왜 우리 학교 나온 애들은 다 비슷하냐", "왜 시골 아빠들은 다 가난하냐". 작가는 무책임한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지난 5년간 두 청년의 시간을 따라간 그는 "전 학교 선생이고 기성세대인데 이 친구들의 고통과 아픔, 희망, 절망을 얼마나 알겠나"라며 "타인의 고통을 그리는 게 힘들어 몇 번을 때려치우려 했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사회적 공동체가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것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쓰게 됐다"고 했다.

작가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제목에 심었다.

'눈감지 마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정용이 불의에 맞서는 에피소드에 붙은 소제목이다.

이 작가는 "사회적인 정의 측면에서 타인에 대해 '눈감지 말라'는 의미도 있지만, 또 하나는 '죽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보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기호는 2000년대 젊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 '사과는 잘해요'와 '차남들의 세계사' 등 감각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문학계에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작가들이 자리잡았다.

그는 "저는 운이 좋았던 작가"라며 "후배들과 예비 작가들에겐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문학이 코로나19란 재난에도 나름의 대응을 했는데,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작품이 읽히고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