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오르간이 품은 비밀공간…대한독립의 열망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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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서양식' 벧엘예배당 송풍실 공개…"3·1독립선언서·태극기 등 이곳서 비밀제작"
한교총 회장 류영모 목사 "파이프오르간 뒤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알려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의 '벧엘예배당'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예배당 내부 전면을 장식한 파이프오르간이다.
1918년 설치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으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예배 때 활용되다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폭격에 소실됐다.
파이프오르간이 제모습을 되찾은 건 2003년이다.
이 교회의 고(故) 이종덕 권사 유족이 마련한 헌금으로 최초 설계됐던 그대로 복원이 이뤄졌다고 한다.
파이프오르간이 예배당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라면, 오르간 벽면 속에 감춰진 공간은 일제에 맞선 독립 투쟁의 비사를 품고 있다.
진귀하게만 보였던 파이프오르간에 가려 출입문이 잘 보이지 않았던 '비밀공간'은 송풍실(구)다.
파이프오르간에 바람을 만들어내는 송풍기관이 있는 곳이다.
이 송풍실은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신문'을 발간하거나 3·1운동 때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몰래 만들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화려한 파이프오르간에 가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사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 유관순 열사 등 이화학당 학생들은 이 송풍실에서 독립 열망을 모아 기도를 올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 5일 교회 측이 취재진에게 공개한 송풍실은 성인 몇 명이 함께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비좁은 공간이었다.
2003년 복원 과정을 거치며 내부 구조는 달라졌겠으나 사방이 가로막힌 직사각형 크기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송풍실은 제단 뒤쪽에 숨은 문을 열자 고개를 숙인 채 나무 계단을 하나둘 밟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선 공간의 높이는 여유가 있는 반면 너비는 양팔을 벌릴 정도에 불과했다.
기자와 함께 송풍실 내부로 들어간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는 공간 좌우 폭을 재듯 양팔을 벌리면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몰래 등사한 곳이 바로 이 송풍실"이라며 "(파이프오르간) 뒤쪽 공간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그러면서 "송풍실은 3·1운동 이후에도 독립 관련 자료를 몰래 만드는 장소로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벧엘예배당은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뱃길로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가 만든 곳이다.
감리교회 선교사인 그는 선교 초기 교육에 집중하고자 배재학당을 세웠는데 이후 학생, 외교관들과 성경 공부, 예배를 위해 마련한 곳이 정동제일교회다.
아펜젤러는 한옥집에서 시작한 교회에 모이는 이가 늘어나자 1895년 벧엘예배당 건립에 나섰다.
2년 후 서양식 건물로 완공된 이곳은 단박에 정동 일대의 명소가 됐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건물 양식에 감탄 소리가 컸다고 한다.
아펜젤러가 1902년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 교회와 예배당은 독립을 꿈꿨던 이들의 교류 장소로 이어졌다.
조선인이 일제의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기를 소망했던 아펜젤러의 바람처럼 배재학당 학생과 정동제일교회 신도들은 독립운동에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교회 기록은 전한다.
/연합뉴스
한교총 회장 류영모 목사 "파이프오르간 뒤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알려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의 '벧엘예배당'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예배당 내부 전면을 장식한 파이프오르간이다.
1918년 설치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으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예배 때 활용되다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폭격에 소실됐다.
파이프오르간이 제모습을 되찾은 건 2003년이다.
이 교회의 고(故) 이종덕 권사 유족이 마련한 헌금으로 최초 설계됐던 그대로 복원이 이뤄졌다고 한다.
파이프오르간이 예배당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라면, 오르간 벽면 속에 감춰진 공간은 일제에 맞선 독립 투쟁의 비사를 품고 있다.
진귀하게만 보였던 파이프오르간에 가려 출입문이 잘 보이지 않았던 '비밀공간'은 송풍실(구)다.
파이프오르간에 바람을 만들어내는 송풍기관이 있는 곳이다.
이 송풍실은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신문'을 발간하거나 3·1운동 때 태극기, 독립선언서를 몰래 만들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화려한 파이프오르간에 가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사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 유관순 열사 등 이화학당 학생들은 이 송풍실에서 독립 열망을 모아 기도를 올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 5일 교회 측이 취재진에게 공개한 송풍실은 성인 몇 명이 함께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비좁은 공간이었다.
2003년 복원 과정을 거치며 내부 구조는 달라졌겠으나 사방이 가로막힌 직사각형 크기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송풍실은 제단 뒤쪽에 숨은 문을 열자 고개를 숙인 채 나무 계단을 하나둘 밟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선 공간의 높이는 여유가 있는 반면 너비는 양팔을 벌릴 정도에 불과했다.
기자와 함께 송풍실 내부로 들어간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는 공간 좌우 폭을 재듯 양팔을 벌리면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몰래 등사한 곳이 바로 이 송풍실"이라며 "(파이프오르간) 뒤쪽 공간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그러면서 "송풍실은 3·1운동 이후에도 독립 관련 자료를 몰래 만드는 장소로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벧엘예배당은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뱃길로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가 만든 곳이다.
감리교회 선교사인 그는 선교 초기 교육에 집중하고자 배재학당을 세웠는데 이후 학생, 외교관들과 성경 공부, 예배를 위해 마련한 곳이 정동제일교회다.
아펜젤러는 한옥집에서 시작한 교회에 모이는 이가 늘어나자 1895년 벧엘예배당 건립에 나섰다.
2년 후 서양식 건물로 완공된 이곳은 단박에 정동 일대의 명소가 됐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건물 양식에 감탄 소리가 컸다고 한다.
아펜젤러가 1902년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 교회와 예배당은 독립을 꿈꿨던 이들의 교류 장소로 이어졌다.
조선인이 일제의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기를 소망했던 아펜젤러의 바람처럼 배재학당 학생과 정동제일교회 신도들은 독립운동에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교회 기록은 전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