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드 연구의 권위자 케빈 바자나의 저서 20년 만에 국내 번역
"굴드의 목표는 피아노로 선(善)을 행하는 것"…생생한 묘사와 풍부한 일화 돋보여
전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모든 것…평전 '뜨거운 얼음'
전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가 열다섯 살에 처음 리사이틀에 데뷔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어느 아이의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열아홉 살 된 자기 아들이 지난(1947년) 10월에 글렌의 연주를 듣고는 집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엄마는 항상 저한테 내세(來世)나 영원한 삶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한 번도 그 말을 믿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밤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듣고서야 믿게 됐어요.

'"
올해는 글렌 굴드가 태어난 지 90년, 세상을 뜬지는 40년이 되는 해다.

역사상 굴드만큼 사람들 입에 회자하고 연구되고 추앙받은 피아니스트는 없었다.

성격, 작품, 사상은 물론, 심지어 연주 때 냈던 악명 높은 노랫소리까지 굴드의 삶의 모든 측면은 수많은 연구자와 팬들에 의해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샅샅이 연구됐다.

미국에서 그가 쓴 편지는 3천달러가 넘는 값에 팔렸고, 자필서명이 들어간 사진은 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굴드가 학창 시절 작곡한 악보는 1만5천달러가 넘는 감정가를 받기도 했다.

캐나다의 음악사학자로 글렌 굴드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케빈 바자나는 평전 '뜨거운 얼음: 글렌 굴드의 삶과 예술'(마르코폴로)에서 굴드의 삶과 예술 세계를 20여 년에 걸쳐 조사한 광범위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꼼꼼히 재구성해 냈다.

저자에 따르면 굴드의 대단한 인기에는 그의 독특한 성격도 한몫했다.

기벽은 매력적이었고 은둔은 신비감을 더했으며, 겸손한 성품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 또 성생활을 멀리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여성 팬들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끔 했는데 이는 굴드의 사생활을 놓고 무수한 추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반항적인 아웃사이더의 이미지가 그를 사후에 더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곡을 해석하는 유별난 방식, 화려한 무대매너, 공연 생활을 버린 것, 관습에서 벗어난 삶…이 모든 것들이 권위와 전통에 대한 고집스러운 저항을 나타냈고, 이 때문에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 되었다.

"
굴드는 특히 고리타분한 스승과 클래식 업계에 맞서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우상이 됐는데, 보수적인 분위기와 형식적인 면 때문에 젊은이들과 거리가 멀었던 클래식 음악계에서 굴드의 불손함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갔다.

하지만 굴드에 대한 열광적 팬덤은 이런 점들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굴드의 목표는 단순히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로써 선(善)을 행하는 것이었다"면서 "굴드는 모든 예술가에게 '도덕적 의무'가 있으며 예술에는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고 강조한다.

굴드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인인 저자는 그동안 나왔던 굴드에 관한 연구서나 평전들이 굴드에게서 캐나다라는 정체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정체성에서 캐나다라는 국적은 매우 중요하다.

굴드의 독창성은 그가 출생한 국가, 주(州), 시(市), 동네, 그리고 시대의 산물이었다.

(중략) 굴드는 평생을 토론토에서 살았으며 뼛속까지 토론토 토박이였다.

그의 작품은 명백히 캐나다의 구현이었다.

"
굴드의 삶을 생생한 묘사와 풍부한 일화로 재구성한 이 책의 국내 출간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2003년 캐나다에서 처음 나온 뒤 외국에 막 판권이 팔리기 시작할 무렵 국내 출간 논의가 있었지만 무산됐다가 20년이 다 된 지금에서야 한국어판이 나왔다.

여기에는 역자(진원스님)의 노력이 있었다.

속세에서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굴드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뜻한 바 있어 출가한 뒤에도 굴드를 놓지 않았다.

굴드의 음악을 들으며 그가 겪은 고독과 외로움을 헤아리던 그는 2년 전 우연히 이 책의 원서를 읽고서 직접 저자와 연락을 취해가며 국내 출간을 주도했다.

덕분에 한국어판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굴드가 코넬리아 포스 등과 맺었던 연인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외국어 번역판으로서는 유일하게 추가됐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피아니스트만 언급해도 저는 조성진, 임동혁, 선우예권, 그리고 손열음 씨를 포함한 한국인 연주자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면서 "이 기회를 발판삼아 글렌 굴드의 작품을 감상하기에 비옥한 환경을 갖춘 국가에 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고 했다.

진원(속명 이태선) 옮김. 700쪽. 3만7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