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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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입시 합격자 발표 날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고사성어가 '수처작주'다.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그러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리라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말에서 왔다. 선(禪)불교 정신을 세운 임제 의현(義玄) 스님의 임제록(臨濟錄)에 나온다.

합격자 발표문은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와 돌담 위에 붙어 있었다. 합격증 받으러 본관으로 가는 길. 진눈깨비가 내리는 운동장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생겼다. 아버지는 지팡이로 물고인 웅덩이마다 물길을 터주셨다. 등록을 마치고 나왔을 땐 비가 그쳤어도 운동장엔 물웅덩이가 여럿 보였다. 아버지가 물길을 터준 웅덩이만 말라 있었다.

"너의 선택을 존중해라." 그때 하신 말씀이다. 학교 선정에 애먹어서 그런지 합격은 했지만, 마음 한 켠에 남아있던 아쉬움을 아버지는 그렇게 씻어주셨다. 이어 하신 말씀이다. "어느 곳에 있건 있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내 집 마당에 물웅덩이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겠느냐? 내가 다니는 학교가 최고라고 마음 먹으면 최고가 된다." 아들을 혼자 서울에 유학 보내는 아버지는 낯설고 어색해하는 내게 학교를 '내 집'으로 끌어들이셨다. 입학하고 한참을 지난 어느 비 오는 날 운동장에 널린 물웅덩이에 물길을 열어주고 난 뒤에야 아버지의 말뜻을 온전하게 이해했다. 다른 이들은 관심 밖이겠지만 내가 손댄 후부터 학교 운동장은 내 집 마당처럼 내 관심의 영역으로 자리하게 됐다. 내가 이 학교 주인이니 학교 안의 흑 한 줌 풀 한 포기마저도 다시 보였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할 땐 선뜻 나서기 어렵다. 자신감이 없어서다. 자신감은 스스로를 믿는 감각이다. 감각이기에 둔해지면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감은 자아존중감(자존감)에서 나온다. 자존감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일이라도 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는 큰마음이다. 자존감이 높으면 자신의 능력을 믿고 높이 평가해 도전적인 상황에서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높다. 자존감이 높은 이는 당연히 다른 이의 인격이나 사상, 행동 등을 높이 사 사교적이다. 자존감은 자신이 한 행동결과로 맛본 성취감이나 다른 이의 칭찬으로 커간다.

그러나 말처럼 쉽진 않다. 쉽지 않은 일을 아버지는 홀로 서울에 남은 자식의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수처작주를 가르쳐 낯선 학교를 사랑하는 법을 일깨워 주신 거다. 사람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데 무엇보다 먼저 갖춰야 하는 인성이야말로 자존감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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