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헌신 외국인' 헐버트·베델 선생 기념우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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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움으로서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기념우표 64만 장을 발행했다고 12일 밝혔다.
기념우표는 총 2종으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한국명 '헐벗'),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 선생의 모습을 담았다.
기념우표 변지(우표가 인쇄되지 않은 가장자리 부분)에는 헐버트의 업적인 사민필지와 아리랑 악보,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유품인 태극기를 담았다.
1886년 한국에 들어와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활동한 헐버트는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을 돕고 영문판 편집 업무도 담당했다.
그는 1905년 고종 황제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한일 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했다.
이후 미국에서도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38년간 투쟁한 헐버트는 1949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됐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에 추서돼 대한민국 독립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았고, 2014년에는 한글에 관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에도 추서됐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직후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들어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한 뒤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를 시작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고종이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일본의 침략을 폭로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된 베델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돼 공로를 인정받았다.
기념우표는 가까운 우체국이나 인터넷우체국(www.epost.go.kr)에서 구매할 수 있다.
/연합뉴스
기념우표는 총 2종으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한국명 '헐벗'),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 선생의 모습을 담았다.
기념우표 변지(우표가 인쇄되지 않은 가장자리 부분)에는 헐버트의 업적인 사민필지와 아리랑 악보,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유품인 태극기를 담았다.
1886년 한국에 들어와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활동한 헐버트는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을 돕고 영문판 편집 업무도 담당했다.
그는 1905년 고종 황제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한일 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했다.
이후 미국에서도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38년간 투쟁한 헐버트는 1949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됐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에 추서돼 대한민국 독립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았고, 2014년에는 한글에 관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에도 추서됐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직후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들어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한 뒤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를 시작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고종이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일본의 침략을 폭로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된 베델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돼 공로를 인정받았다.
기념우표는 가까운 우체국이나 인터넷우체국(www.epost.go.kr)에서 구매할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