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우리 차례' 불안…미·중·터키 등과 관계 확대
"러의 우크라 침공, 동맹관계 재고하는 계기로 작용"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 구소련국 '푸틴에 거리두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우방인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이 지역 국가들이 러시아와 점점 더 거리를 두려 하고 있으며,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예기치 않은 도전'이 되고 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4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올 1월 카자흐스탄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러시아는 옛 소련 국가들의 안보협의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틀을 빌려 현지에 공수부대 등 2천여명의 러시아군을 파견, 카자흐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고 안정을 찾도록 도움을 줬다.

이로부터 6주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고, 카자흐는 러시아에 보은할 기회를 얻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카자흐는 옛 소련의 일원이던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에 중립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현재 옛 소련 국가 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나라는 벨라루스가 유일하다.

카자흐는 러시아를 우회해 유럽으로 자국산 원유 수출을 늘리겠다고 밝히면서 오히려 유럽의 대러 제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국방 예산을 늘리고, 미국 정부의 대표단을 자국에 불러들이는가 하면, 서방 제재로 러시아와의 교역이 축소되자 터키, 중국 등 대체 국가들로 눈을 돌리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분명히 선을 긋고 있는 모습이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수십년 동안 러시아는 옛 소련 국가들과 군사적·경제적 연합을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노력해왔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와 문화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지역이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 구소련국 '푸틴에 거리두기'"
이 가운데 서유럽 전체 면적보다 큰 광활한 국토를 지닌데다 석유 자원까지 풍부한 카자흐스탄은 특히 러시아로서는 중요한 나라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양국 관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자국과 여러모로 유사점이 많은 옛 소련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침공당하자 불안감을 느낀 카자흐스탄은 우선순위였던 러시아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면서, 미국과 중국, 터키 등의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타진하고 있다고 카자흐 전·현직 관리들과 정치인들은 WSJ에 밝혔다.

양국 관계의 변화 기류는 지난달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SPIEF)에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세력인 도네츠크공화국(DPR)과 루한스크공화국(LPR)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푸틴 대통령의 면전에서 밝힌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SPIEF 기간 러시아 국영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제재를 어기도록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면서도,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의 핵심 동맹으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고 WSJ은 전했다.

사야사트 누르베크 카자흐 의원은 이런 카자흐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얼룩다람쥐가 어떻게 줄무늬를 몸에 지니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시베리아 설화를 꺼냈다.

이 설화는 친구인 곰이 선의로 얼룩다람쥐의 등을 어루만졌지만, 날카로운 발톱 탓에 피부가 긁히면서 무늬가 생겼다는 내용이다.

누르베크 의원은 "이 이야기의 교훈은 '당신이 곰을 친구로 두고 있으면,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그리고 분위기가 좋을 때에도 항상 등 뒤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에 무조건 보조를 맞추지 않을 것이라는 조짐은 앞서 전쟁 직후인 3월 초 러시아에 침공 중단을 촉구한 유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대신 기권한 데에서부터 드러났다.

유엔 결의안 표결이 있은 지 며칠 후엔 28t의 의료 물품을 실은 보잉(B)-767 항공기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구호품을 우크라에 보낸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달 초엔 러시아로의 일부 수출을 제한하는 서방의 제재에 따르겠다는 행정명령 초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 구소련국 '푸틴에 거리두기'"
카자흐스탄의 이런 태도에 대해 러시아 일각에서는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러시아 국영 방송 프로그램의 사회자인 티그란 케오사얀은 4월 말 "카자흐스탄, 이게 무슨 배은망덕이냐"고 반문하며, 계속 그런식으로 교활하게 나간다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와 거리를 두는 것은 최근 몇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뒤로 물러나 있던 미국으로서는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WSJ은 분석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4월 이래 고위 외교관과 군 고위 관계자를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에 파견해 관계 강화를 도모했다.

중앙아시아의 이 같은 동향에 러시아도 촉각을 세우고 있는 모양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달 28일 우크라 침공 이후 첫 해외 방문국으로 타지키스탄을 찾은 것은 최근 임명된 미국 중부 사령부의 에릭 쿠릴라 사령관이 타지키스탄을 다녀간 1주일 후였다고 WSJ은 짚었다.

러시아 학술기관 과학아카데미에서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안드레이 그로진 연구원은 "러시아는 아직 불안해하지는 않고 있다"면서도 "양국의 긴 국경선을 공유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카자흐스탄 정부가 적대적으로 돌아선다면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로진 연구원은 그러면서도 "카자흐스탄 엘리트들은 우크라이나 동료들보다 '자기보호 본능'이 훨씬 강하다"면서 "아마도 이런(러시아에 반기를 드는)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