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동행] "남 아닌 나를 위해"…60여년 대 이은 미용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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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미용실 안태우 원장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처음에는 손을 풀어볼 마음으로 시작했죠."
대구백화점 프라자점에서 어린이미용실 '메쟝팡'을 운영하는 안태우 원장은 쑥스러워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안 원장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나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고 미용 기술을 처음 배운 뒤 손을 풀어보고 연습이 필요해서 했다"며 자신을 낮췄다.
97년부터 미용업을 시작한 안 원장은 그해부터 수성구의 한 아동복지시설에 매달 한 번씩 찾아가 아이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후 미용 봉사 요청이 들어오면 어디든 언제든 발길을 재촉했다.
"아동복지시설은 한 14년을 꾸준히 했어요.
특별한 이유라면 제가 아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
그의 미용실에서 만난 안 원장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로 우는 아이를 살갑게 대하며 능숙하게 머리를 다듬었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메쟝팡'이 가게 이름인 이유가 이해됐다.
안 원장은 25년의 나눔 봉사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떠올렸다.
"나이가 열살 쯤으로 머리 자르는 걸 너무너무 싫어해서 선생님들이 애의 손을 묶고 머리를 자르도록 하더라. 그게 너무 싫어서 그 친구를 풀어 주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그 친구가 창틀에 매달리면 같이 매달려서, 그 친구가 바닥에서 뒹굴면 같이 뒹굴면서 머리를 잘랐었다.
그렇게 한 5~6개월이 지나니 그 친구가 얌전히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안 원장의 봉사는 누구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모친인 이기조 원장도 미용업을 하며 미용 봉사를 다녔다.
어머니를 따라다닌 안 원장에게 봉사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안 원장은 "어머님은 현직에 계실 때 꾸준히 봉사를 다니셨어요.
오랜 시간 그러다 보니 제게는 봉사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고 해야 할 일 같은 느낌이었죠"라고 했다.
올해로 쉰둘인 그와 모친의 봉사 기간을 합하면 어림잡아 60년은 족히 넘는다.
봉사에 대한 안 원장의 생각은 담백했다.
안 원장은 "봉사를 함으로써 스스로 어떤 자극을 주는 거죠. 누군가를 도와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돕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도 있고 내가 가진 기술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기분이 좋죠"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 친구가 자기는 '봉사를 하고 싶은데 봉사할 곳을 못 찾겠다' 하더라. 그래서 가까운 곳 아무 곳이나 가보라고 했다.
그냥 내가 대가 없이 내 몸을 조금만 희생하면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고 어쩌면 네가 좋은 거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대를 이어오던 봉사의 발길은 지난 1년 쉼표를 가졌다.
안 원장은 "코로나19가 확산하며 복지시설과 요양원 등에서 들어오던 봉사 요청이 뚝 끊겼다"면서 "아무래도 미용은 대면해야 하고 신체접촉이 많은 터라 각종 시설에서는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늘 하던 봉사를 안 하니 마음이 불편했는데 코로나19 확산세가 줄어들며 다시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확산세라고 하니 걱정이 된다"며 말을 맺었다.
/연합뉴스
"처음에는 손을 풀어볼 마음으로 시작했죠."
대구백화점 프라자점에서 어린이미용실 '메쟝팡'을 운영하는 안태우 원장은 쑥스러워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안 원장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나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고 미용 기술을 처음 배운 뒤 손을 풀어보고 연습이 필요해서 했다"며 자신을 낮췄다.
97년부터 미용업을 시작한 안 원장은 그해부터 수성구의 한 아동복지시설에 매달 한 번씩 찾아가 아이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후 미용 봉사 요청이 들어오면 어디든 언제든 발길을 재촉했다.
"아동복지시설은 한 14년을 꾸준히 했어요.
특별한 이유라면 제가 아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
그의 미용실에서 만난 안 원장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로 우는 아이를 살갑게 대하며 능숙하게 머리를 다듬었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메쟝팡'이 가게 이름인 이유가 이해됐다.
안 원장은 25년의 나눔 봉사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떠올렸다.
"나이가 열살 쯤으로 머리 자르는 걸 너무너무 싫어해서 선생님들이 애의 손을 묶고 머리를 자르도록 하더라. 그게 너무 싫어서 그 친구를 풀어 주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그 친구가 창틀에 매달리면 같이 매달려서, 그 친구가 바닥에서 뒹굴면 같이 뒹굴면서 머리를 잘랐었다.
그렇게 한 5~6개월이 지나니 그 친구가 얌전히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안 원장의 봉사는 누구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모친인 이기조 원장도 미용업을 하며 미용 봉사를 다녔다.
어머니를 따라다닌 안 원장에게 봉사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안 원장은 "어머님은 현직에 계실 때 꾸준히 봉사를 다니셨어요.
오랜 시간 그러다 보니 제게는 봉사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고 해야 할 일 같은 느낌이었죠"라고 했다.
올해로 쉰둘인 그와 모친의 봉사 기간을 합하면 어림잡아 60년은 족히 넘는다.
봉사에 대한 안 원장의 생각은 담백했다.
안 원장은 "봉사를 함으로써 스스로 어떤 자극을 주는 거죠. 누군가를 도와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돕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도 있고 내가 가진 기술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기분이 좋죠"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 친구가 자기는 '봉사를 하고 싶은데 봉사할 곳을 못 찾겠다' 하더라. 그래서 가까운 곳 아무 곳이나 가보라고 했다.
그냥 내가 대가 없이 내 몸을 조금만 희생하면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고 어쩌면 네가 좋은 거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대를 이어오던 봉사의 발길은 지난 1년 쉼표를 가졌다.
안 원장은 "코로나19가 확산하며 복지시설과 요양원 등에서 들어오던 봉사 요청이 뚝 끊겼다"면서 "아무래도 미용은 대면해야 하고 신체접촉이 많은 터라 각종 시설에서는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늘 하던 봉사를 안 하니 마음이 불편했는데 코로나19 확산세가 줄어들며 다시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확산세라고 하니 걱정이 된다"며 말을 맺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