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 '흰'에서 영감…가나아트센터 개인전 '인 메모리'
'실 엮는 작가' 시오타 치하루, 삶과 죽음을 흰 실로 연결하다
'실을 엮는 작가'로 유명한 시오타 치하루(50)가 하얀색 실로 만든 대형 설치작품으로 2년 만에 국내 관람객을 맞는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5일 개막한 개인전 '인 메모리'(In Memory)에서 작가는 100평(330㎡) 가까운 공간을 흰 동굴로 만들었다.

하얀색 털실 뭉치 수천 개가 그물처럼 엮여 거대한 입체가 된 이 작품은 '인 메모리'로,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전시장 천장에 여러 겹으로 겹쳐진 흰 그물은 가운데 놓인 흰 나룻배 골조를 중심으로 바닥과 4개 벽면을 연결한다.

와이어로 매달아 살짝 띄운 배에는 흰색으로 칠한 드레스 3벌이 나란히 서 있다.

그물과 그물 사이에는 A4 용지 수백 장이 끼워져 있다.

시오타 치하루는 암을 두 차례 경험한 이후 혈관 또는 죽음을 연상할 수 있는 빨간 실을 주로 사용했지만, 이번 작품은 벽과 바닥을 제외하고 온통 하얀 공간을 만들었다.

'실 엮는 작가' 시오타 치하루, 삶과 죽음을 흰 실로 연결하다
작가는 전시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흰 실을 쓰게 된 것은 소설가 한강이 쓴 '흰'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강의 '흰'에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아이의 사연이 나온다"며 "저도 임신 6개월 때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아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경험이 있어 상당히 공감해 흰 실을 꼭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강이 2016년 출간한 소설 '흰'은 강보와 배내옷, 입김, 쌀, 백지, 백발, 수의 등 흰 것과 관련한 65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책이다.

작가는 한국인 남편과 2020년 '흰'을 함께 읽었다며 책 표지에 쓰인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란 문구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하얀색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삶도 같이 표현한다고 생각한다"며 "죽음이 있으면 다시 삶이 있기 때문에 생과 사 모두를 염두에 뒀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배는 기억을 담고 앞으로 나가는 의미이며 작가가 자주 표현하는 드레스는 '제2의 피부'로 자신을 타인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A4 용지는 일기나 편지 등 기억을 기록한 것들을 뜻한다.

'실 엮는 작가' 시오타 치하루, 삶과 죽음을 흰 실로 연결하다
그는 "기억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관해 생각한다"며 "큰 배 위에 얹힌 옷의 외피와 같이 우리는 기억의 바다에서 영원히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비롯해 실을 엮는 대형 설치작업을 할 때 대강의 스케치만 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완성작이 첫 스케치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스태프 10명과 함께 12일 동안 작업한 이 작품 역시 애초에 배를 바닥에 놓기로 했다가 천장에 매달아 띄웠고, 태커 핀으로 실을 고정하는 위치들을 그때그때 느낌에 따라 결정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실 엮는 작가' 시오타 치하루, 삶과 죽음을 흰 실로 연결하다
일본 오사카 출신인 시오타 치하루는 유학 생활을 한 독일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회화로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껴 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 실로 작업한 조각과 평면 등의 신작들도 선보인다.

전시 8월 21일까지.
'실 엮는 작가' 시오타 치하루, 삶과 죽음을 흰 실로 연결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