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드나들던 갱도는 매립하고 엉터리 안내판
세계유산 등재 갱구는 잘 보전하고 설명도 자세히
'잡초와 수풀이 우익 세력 못지않다.

'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강제 노역한 일본 나가사키현 다카시마를 찾아갔다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가해 현장을 살펴볼 요량이었으나 풀과 나무가 곳곳을 뒤덮어 탄광 갱도 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은 조선인 강제 노역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홋케이세이갱 주변은 말끔하게 정리돼 있어 대조적이었다.

◇ 조선인 강제동원 탄광 섬…잡초 무성·엉터리 안내판
기자는 나가사키항 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을 타고 30여분 거리에 있는 다카시마 섬을 지난달 29일과 이달 1일 두 차례 방문했다.

이 섬은 일제강점기에 미쓰비시광업(미쓰비시머티리얼의 전신)이 운영하던 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했다.

조선인 강제 연행 관련 자료를 장기간 수집·분석한 역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 씨의 저서에 의하면 이 섬에 2천명 이상의 조선인이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섬의 면적은 약 1.24㎢로 그리 크지 않지만, 방문자가 조선인 강제 노역의 역사를 확인하기는 극히 어려운 상태였다.

선착장에서 5분 거리에 1937∼1945년 사용된 나카야마 신(新)갱의 입구가 남아 있다.

하지만 풀이 기자의 어깨보다 높게 자라서 갱도 입구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갱도 입구는 반원형의 작은 터널 모양이었고 입구가 콘크리트로 봉해져 있었다.

표지판을 가린 풀을 손으로 치우고 내용을 확인했더니 일본어와 한글 설명이 서로 다르게 돼 있었다.

이 갱도 입구가 기재(機材) 등의 운반용으로 사용된 갱구였으며 사람이 드나들거나 석탄을 반출하는 갱구는 근처의 다른 곳에 있었지만, 그 자리를 메우고 노인복지시설을 세웠다는 취지의 설명이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한글 안내문은 달랐다.

이 갱도 입구로 기자재와 석탄을 운반했고 사람도 출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석탄을 반출하던 갱구는 매립했고 그 자리에 양로원을 세웠다는 문장이 이어져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다.

나가사키시나 다카시마 지역센터가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를 살펴봤다.

거기에는 물자와 사람이 모두 이동하던 갱도라는 취지로 적혀 있었다.

안내판에 적힌 일본어 설명과 한글 설명이 일치하지 않았고, 인터넷 사이트의 설명은 안내판의 일본어 기재 내용과도 다른 셈이다.

어디에도 조선인 강제 동원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다.

갱도의 용도에 대한 설명조차 일관성이 없는데, 일본이 감추려는 역사가 제대로 적혔을 리가 없었다.

다카시마 지역센터에 연락해 제각각인 안내문에 관해 물었다.

담당자는 '확인해보겠다'고 하더니 해당 갱도 입구는 기재 운반용으로만 사용된 것이며, 웹사이트에 올린 안내문이 틀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지적을 수용해 오류를 수정하겠다고 정중하게 밝혔다.

하지만 고치는 김에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다카시마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도 반영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나는 결정 권한이 없으니 그런 의견이 있다는 취지를 관련 부서에 전달하겠다'고 반응했다.

◇ 조선인 드나든 갱도는 사라져…위안소·숙소 찾을 수 없어
나카야마 신갱에서 작업자들이 드나들던 입구는 오래전에 매립됐고 그 자리에 노인복지시설이 설치돼 있다.

담당자의 설명에 따르면 노인복지시설이 1989년에 건립됐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실제로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갱도 입구가 사라진 지 적어도 33년이 지난 것이다.

다카시마의 남쪽에 1913∼1986년에 사용된 후타코 사갱(斜坑·비탈진 갱도)이 있었다.

후타코 사갱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현재는 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담당자는 "사갱은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후타고 사갱 입구에 설치돼 있던 돌로 만든 미쓰비시 로고 모양의 구조물은 선착장 근처에 있는 석탄 자료관에 보관돼 있었다.

후타코 사갱이 있던 곳보다 조금 북쪽에 후타코 신(新)갱 입구가 남아 있다.

이곳은 패전 후 만들어진 갱도라서 조선인 강제 동원과 직접 관련은 없는 시설이다.

주변에 철망이 둘러쳐져 있고 풀이 키보다 높게 자라서 갱도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게 돼 있었다.

다카시마에는 조선인 숙소나 조선인 위안부 시설도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으나 짧은 여정으로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부끄러운 역사를 알리는 시설을 일본 측이 보존했을 가능성도 적지만 무엇보다 골목길이나 수풀 사이 산책로 등은 온통 풀과 나무로 뒤덮인 곳이 많아 포장된 도로 외에는 이동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계유산에 등재된 갱도는 잘 보존하고 자세하게 설명
섬 곳곳이 수풀에 잠식당하고 있었고, 곳곳에 버려진 집과 허물어져 가는 건물이 방치돼 있었다.

1986년 폐광과 더불어 다카시마가 경제적 쇠락과 인구 감소를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제 노역의 현장이 잘 보존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은폐나 왜곡보다는 관리 능력 부족으로 인한 결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2015년 7월 군함도(정식명칭 하시마)와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된 홋케이세이갱과 비교해보니 가해의 역사 현장이 보전되지 않은 것은 능력보다는 의지의 문제로 보였다.

홋케이세이갱은 다카시마에 있던 여러 갱 입구 중 하나다.

1876년에 일찌감치 가동 종료됐지만 1945년까지 사용된 다른 갱보다 보존 상태는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나가사키시는 홋케이세이갱이 "외국 자본과 기술이 일본에 처음으로 도입된 석탄 갱"이며 "근대적 탄광 기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주변은 상당히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시설물에 대한 설명도 꽤 자세했다.

자랑하고 싶은 역사는 공들여 보존하고, 부끄러운 역사는 외면하고 감추는 행태가 다카시마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소였다.

후타고 사갱이 있었던 곳보다 약간 남쪽에 '군함도가 보이는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야트막한 전망대가 있다.

조선인 강제 노역의 현장인 해저 탄광이 있던 군함도와 군함도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무인도인 나카노시마가 나란히 보이는 곳이었다.

강제 노역 현장인 군함도와 다카시마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타국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의 시신을 태운 화장터가 있던 나카노시마가 그 사이에 있는 구도다.

전망대의 안내판에는 "하시마 탄광은 83년간 양질의 석탄을 산출해 다카시마 탄광과 함께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쳤다"고 적혀 있었다.

누가 해저 갱도에서 석탄을 캤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연합뉴스